유엔 사무총장이 사라졌다. 최근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무차별 폭격으로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그런데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다가 유엔 난민구호사업국이 운영하는 학교를 이스라엘이 공격하여 40여명이 사망한 뒤에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totally unacceptable) 행위"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였을 때 코피 아난 당시 사무총장이 "오늘은 유엔 역사상 가장 슬픈 날입니다"라는 한 마디로 미국의 침략 행위를 준엄히 심판했을 때 귓가를 울리던 것과 같은 전율이 느껴지지 않는다.
신중함 지나친 반기문 총장
반 총장은 단지 이러한 행위가 "다시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should not be repeated)"고 얼버무렸다. "다시는 발생하지 말아야 할 행위'가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폭격인지, 유엔사무소에 대한 공격인지 불분명하다. 고위직 외교관다운 신중함에 자신이 수장인 조직의 안위까지 염두에 둔 포석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현 중동사태는 반 총장이 특유의 신중함과 중립적인 처신으로 해결될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가자 지구에서는 백린탄까지 동원한 이스라엘의 무차별 폭격으로 어린이를 포함한 수많은 민간인이 죽어가고 있다. 레바논의 헤즈볼라 세력까지 개입되는 경우 확전이 불가피하다. 그만큼 긴급한 상황이다. 조직의 안위를 걱정하기에 앞서 위기에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할 경우 유엔의 존립 근거 자체를 상실할 수 있다. 반 총장에 대한 국제사회의 평가도 이번 사태 해결과정이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본다.
반기문 총장은 현재 중동을 방문하고 있다. 하지만 중동평화에 대한 주도적 대안이 없는 상태로 여러 나라를 방문한다고 해서 어떤 구체적 성과를 얻을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더욱이 이는 사태의 본질을 오도하는 해결 방식이다. 지금 반 총장이 총력을 기울여 상대해야 하는 대상은 이스라엘도 팔레스타인도 아닌 미국이다.
가자 지구에서의 이스라엘군 완전 철수와 휴전을 촉구하는 지난 8일의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채택 과정에서, 15개 상임이사국 중 유일하게 기권한 나라가 미국이다. 이러한 미국의 행위에 대하여 반 총장은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과연 반 총장이 중동사태의 해결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유엔 사무총장은 형식적으로 유엔의 행정수반이지만, 헌장 제99조에 의거하여 국제평화와 안전을 위협한다고 인정되는 사항에 대하여 안전보장이사회의 주의를 환기시킬 수 있고 유엔의 다른 기관에 권고할 수도 있다. 이를 통해 역대 유엔 사무총장은 국제사회의 주요 분쟁의 해결과정을 주도하고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함마슐드는 콩고 내전 중재과정에서 항공기 추락사고로 사망하였고, 발트하임은 한반도 긴장 완화를 이끌었다. 케야르와 갈리 총장은 중동 평화안을 성사시켰다. 미국의 지지를 받았던 아난은 이라크 침공을 감행한 미국의 일방주의를 온몸으로 막아냈다.
유엔헌장 정신 위한 헌신을
2008년 한해 동안 반 총장은 700회의 양자 협상을 주도했고 35개국을 방문하면서 40만km 이상의 여행을 하였다. 과연 그가 천명한대로 일하는 사무총장의 표상이다. 하지만 그렇게 부지런한 반 총장이 그간 국제여론으로부터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의 존엄을 위한 유엔 헌장 정신을 구현하는데 순교자적 자세를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 팔레스타인 사태는 반 총장이 역량을 발휘하고 이미지를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공포에 떨고 있는 팔레스타인 어린이의 눈빛을 가슴에 품고 결단하기 바란다. 갈리와 같은 비전과 아난과 같은 행정력을 겸비한 유엔 사무총장으로 평가되길 기대한다.
이용중 동국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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