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월스트리트. 최근까지 연간 수백조 달러가 움직이며 미국경제를 떠받치던 이곳은 바로 1980년대 이후 세계경제를 주무르던 신(新)금융자본주의의 성지(聖地)였다.
그러나 2009년 현재 월스트리트는 사기꾼이 득실대는 암(暗)시장, 탐욕만이 지배하는 늑대 소굴이라는 비난의 진원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전 나스닥 회장이기도 했던 거물 펀드매니저 버나드 메이도프의 500억달러 다단계 사기행각이 비틀거리던 월스트리트에 카운터 펀치를 날린 후 제 2, 3의 메이도프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 상황.
첨단 금융공학을 앞세워 세계경제를 지배하던 미국의 거대 금융회사들은 어떤가. 2007년까지만 해도 미국 전체 기업수익 중 40%를 차지하던 이들은 현재 정부의 구제금융을 산소호흡기 삼아 간신히 버티고 있다.
세계 모든 금융인들이 추앙해 마지 않던 5대 투자은행(IB) 중 리먼브러더스 베어스턴스 메릴린치 등이 파산 또는 인수합병(M&A) 됐으며,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는 은행지주사로 전환했다.
미국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씨티그룹은 현금 확보를 위해 직원 5만명을 해고한 것도 모자라 '알짜' 증권중개사업부문 스미스바니(Smith Barney)를 모건스탠리에 넘기고 금융슈퍼마켓에서 일개 은행으로 움츠러들었다.
월스트리트의 남은 생존자들은 한때 그들이 후진국이라고 조롱했던 싱가포르, 쿠웨이트, 한국 등 신흥경제국 투자자들의 자금을 수혈 받고자 허리를 바짝 조아리고 있다. 이를 두고 영국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자본주의의 상징인 월스트리트가 국가의 지원을 받는 신흥경제국 투자자들에 의해 긴급 구제되었다"고 묘사했다.
그렇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 최고의 금융허브 월스트리트는 '망했다'. 그렇다면 금융경쟁력이 곧 국가 경쟁력으로 통하던 금융자본주의 시대도 끝난 걸까. 우리나라와 같은 신흥국들은 이제 금융에 대한 꿈을 접고 다시 제조업으로 발길을 돌려야 하는가.
■ 新금융자본주의의 종언 혹은 제2막?
진짜 몰락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월스트리트가 상징하는 '신금융자본주의'의 정의부터 알아야 한다. 학계에서는 금융이 국가경제를 이끌던 자본주의체제를 20세기 초반 대공황 이전의 금융자본주의와 80년대 이후 신금융자본주의로 구분하고 있다.
20세기 초반의 금융자본주의는 은행이 기업을 직접 소유하고 지배하는 형태였다. 당시 은행의 힘은 막강했다. 1912년 당시 5대 은행이 지배하는 기업의 자산규모는 미국 국민총생산(GNP)의 무려 56%를 차지했다.
1913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설립 이전에는 JP모건이 최종 대부자로서 실질적인 중앙은행 역할을 했을 정도다. 당시 모건가(家)는 철도, 전화, 가스, 전력 등 공익사업에 집중 투자했으며, 1893년과 1907년 금융위기 시 투자은행 도산을 막기 위해 자금을 무제한 대출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금융의 황금기는 대공황 이후 쇠퇴하고 만다. 미국경제를 독점하다시피 한 금융자본이 대공황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원죄론, 거대 경제권력에 대한 견제심리 등이 여론으로 발전하면서 정부는 강력한 금융규제책을 실시하게 된다.
상업은행과 투자은행 기능이 분리되고(1933) 은행의 기업지배가 제한되면서(1938) 금융은 '기업 지배자'에서 '투자자'로 한발 물러난다.
금융자본주의가 다시 고개를 든 것은 80년대 들어서다. 그러나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과거 금융자본주의가 소수의 독점적 은행들과 예금, 산업대출 등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면, 신금융자본주의는 수많은 금융주체(헤지펀드, 사모펀드, 뮤추얼펀드, IB 등)와 수많은 금융상품 및 기법(주식, 채권, 외환, 파생상품, 레버리지, 공매도 등)이 취급되는 과정에서 금융의 역할이 확대된 것이다.
특히 다양한 파생상품을 가능케 한 IT기술 발달과 금융규제를 풀도록 재촉한 신자유주의 이념의 보급이 신금융자본주의 발전의 토대가 됐다.
유정석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신금융자본주의의 특징은 금융의 ▲펀드화(헤지펀드 성장 등) ▲복합화(파생상품화, 증권화 등) ▲글로벌화(자본시장 개방)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면서 "이 같은 특징은 동시에 이번 금융위기를 발단ㆍ 증폭시킨 요인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 전망: 금융위기는 금융으로 풀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자 <먼슬리 리뷰> 편집장인 존 벨라미 포스터는 이번 경제 위기를 '자본주의의 위기이자 금융자본주의의 종말'이라고 진단했다. 먼슬리>
그러나 주류 경제학자들은 당장엔 금융자본주의가 위축되고 국가개입이 커질 수는 있으나 결국 상당기간 명맥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금융위기에서 벗어나려는 각국의 노력이 다시 금융자본주의를 강화하고 있다는 아이러니에 주목한다.
부실기업 채권을 프라이머리-CBO(회사채담보부유동화증권)라는 파생상품으로 묶어 발행한다거나(복합화), 아시아통화기금(AMF)이나 한ㆍ중ㆍ일 스와프 등으로 외환문제를 해결하고(글로벌화), 채권시장안정펀드나 은행 자본확충펀드 등을 통해 유동성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펀드화)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물론 이런 금융자본주의적 해결방안은 당장 위기를 해소할 수는 있으나 위기재발 가능성을 계속 안고 가야 한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그러나 삼성연 유 연구원은 "금융자본주의가 특유의 위험성을 갖고 있지만 그 위험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 또한 크다"면서 "특히 엄청난 M&A시장이 열리고 있어 IB, 파생상품은 더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다만 정부의 적절한 규제와 기업의 모럴해저드(도덕적해이) 해소 등은 이번에 반드시 해결하고 가야 할 문제"라고 덧붙였다.
금융상품 자체는 순기능과 역기능을 모두 가지고 있는 만큼 이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결국 금융자본주의의 내일을 결정할 열쇠를 쥔 셈이다.
프랑스 석학 자크 아탈리 박사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금 상황은 자본주의 성장의 위기이지 자본주의 자체의 위기나 종말은 아니다. 이제 던져야 할 가장 큰 질문은 전 지구적으로 공동 대처ㆍ공동 운영이 가능한가이며, 우리가 그러한 역량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 세계 증권거래소 통합화 '잰걸음'
세계 금융허브 순위 1, 2위를 다투는 런던과 뉴욕. 그러나 멀지 않은 미래에는 이 두 도시의 금융시스템이 서로 경쟁하지 않고 하나로 통합되는 날이 올 것으로 보인다. 바로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증권거래소 통합화 및 전산화 바람 때문.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전문가들은 "금융자본주의의 복합화, 글로벌화, 펀드화 등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며 "향후 게임(금융자본주의)의 전체 지형 뿐 아니라 룰(rule)과 플레이어 등도 큰 변화를 겪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14일 업계에 따르면 전세계적인 금융위기 속에서도 전세계적인 증권거래소 통합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2005년 이후 본격화된 거래소 통합 바람은 미국의 뉴욕증권거래소(NYSE)가 유럽의 '유로넥스트'(Euronext)를 흡수 합병해 초대형 주식시장을 출범시킨 것을 비롯해 나스닥의 'OMX'(스웨덴) 및 필라델피아거래소 인수, 영국 런던증권거래소(LSE)의 이탈리아거래소 인수 등으로 갈수록 치열해지는 양상이다.
중국, 일본, 싱가폴, 대만 등 아시아국가들과 중동 이슬람국가들까지 이 같은 흐름에 동참하고 있어 앞으로 전세계 증권거래소는 10개 내외로 압축될 전망이다.
최근 거래소 통합 움직임은 서로 다른 대륙까지 넘나든다. 세계 최대규모의 거래소가 탄생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NYSE유로넥스트와 독일 도이체 뵈르제(프랑크푸르트증권거래소 운용사)의 합병논의는 한달간의 논의 끝에 이달 7일 무산됐다.
그러나 도이체 뵈르제는 성명서를 통해 "기업가치를 높이기 위해 계속 다양한 수단을 검토할 것"이으로 결정해 합병에 대한 노력을 계속할 뜻을 밝혔다. 미국 나스닥은 최근 영국 런던에 사무소를 열고 2년 전 인수에 실패한 LSE와 본격적 경쟁을 펼치고 있다.
오일머니가 넘치는 중동 국가들도 거래소 통합논의를 조심스럽게 진행하고 있다. 바레인과 쿠웨이트, 오만,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등 걸프 연안 6개국이 그 중심에 있다. 각국의 개별 거래소는 시가총액에 비해 거래가 거의 없어 통합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다.
일례로 중동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증권거래소를 리야드에 보유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시가총액 5,000억달러로 세계 8위권에 속하나 상장기업수가 10여개에 지나지 않는다. 카타르의 두바이상업거래소 역시 지나치게 조용한 거래소 분위기를 외부에 알리지 않기 위해 거래시간 동안 외부촬영을 금지할 정도.
유정석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각국의 거래소가 통합되고 전산화되면 기업은 손쉽게 해외자금을 유치할 수 있고, 투자자도 더 많은 투자처를 확보할 수 있다"면서 "그러나 금융위기의 확산속도도 그만큼 빨라져 고도의 리스크 관리능력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문준모 기자 moonj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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