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최고의 칼잡이 검사'로 불리며 대형 사건 수사에서 뚝심을 보여줬던 박영수(58ㆍ사시 20회) 서울고검장이 검찰을 떠난다. 박 고검장은 연말로 임기를 마치는 임채진 검찰총장을 잇는 검찰총수 후보로도 꼽혔지만 이번 검사장 인사를 앞두고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겠다며 용퇴를 결심하고 15일 퇴임식을 갖는다.
박 고검장은 SK비자금 수사와 현대차 비자금 수사를 직접 지휘해 경제권력에 검찰의 칼을 들이대면서 일약 스타검사로 떠올랐다. 2002년 서울중앙지검 2차장으로 SK비자금 수사에 착수하자 각계에서는 "국가부도가 우려된다"며 거센 압력을 가해 왔다.
그는 "나 자신도 수사의 파장이 염려돼 유수한 경제학자와 경제관료들에게 자문을 구하던 차에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인물로부터 '재벌이 불투명한 회계나 경영관행을 벗지 않는 한 2만불 시대 도래는 어렵다'는 말을 듣고 수사에 자신감을 얻었다"고 회고했다.
수사 개시가 결정되자 그는 사상 처음으로 재벌 회장의 집무실을 압수수색하기로 결정하고 수사팀에 "증거자료를 확보하지 못하면 돌아올 생각을 말라"는 특명을 내렸다.
결국 수사팀은 회장실에서 분식회계와 관련한 결정적 증거를 확보했고, 그룹 최고 경영진의 사법처리에 이어 대선자금 수사의 단초까지 제공할 수 있었다.
현대차 수사도 쉽지 않았다. 그는 "SK수사의 경험으로 현대차 수사는 다소 수월한 측면이 있었지만, 농협중앙회장 처리에 애를 먹었다"고 했다.
현대차에 양재동 건물을 넘기면서 3억원을 받은 정대근 당시 농협중앙회장의 비리 혐의를 포착했지만 당시 여권 실세들의 압박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법원에서도 공소장 변경을 요구하는 등 여러 장애가 있었지만 결국 구속 기소를 관철했다.
SK와 현대차 비자금 사건 수사는 재벌의 분식회계 관행을 근절시켜 한국 기업의 대외 신인도를 한층 높이는 계기가 됐다는 게 검찰 안팎의 객관적인 평가다. SK비자금 사건 수사를 재가했던 김각영 전 검찰총장은 "검찰이 칼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제대로 보여준 검사"라고 박 고검장을 평했다.
그러나 살아있는 권력에 칼을 대다 보니 인사에서 불이익을 받는 불운도 감수해야 했다. SK사건 수사 직후 요직으로 통하는 길목인 서울중앙지검 2차장에서 부산동부지청장으로 사실상 좌천을 당했고, 참여정부에서는 중수부장을 두 번씩 역임했지만 중용되지 못하고 대전고검장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박 고검장은 "칼잡이 검사로 후회없이 살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27년간 휘둘렀던 칼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표정에는 서운한 감정이 짙게 배어났다.
김정곤 기자 jk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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