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남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수묵의 농담과 여백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가 없다. 퍼져나가던 수묵이 그친 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조금씩 희미해져가는 색과 화선지의 여백이 교감하면서 서로를 끌어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말하자면, 이것이 번짐이다. 번짐은 자신의 색을 고집하지 않고, 건너가야 할 대상과의 사이에 가로놓인 벽을 무너뜨리려고도 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향한 겸허한 그리움으로 자신의 고유한 색을 흐릿하게 지울 수 있을 때 번짐은 시작된다.
그러므로 붓은 여백을 메우기 위해 색을 칠하는 동시에 여백을 만들기 위해 색을 지울 줄 아는 데서 향기가 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꽃과 열매, 여름과 가을, 음악과 그림, 삶과 죽음 사이의 벽을 어루만지는 번짐을 위해 이제 물끄러미 흐릿해질 시간이다.
아쉬움이 많지만, 무엇인가를 그친다는 것이 또 하나의 삶이 될 수 있음을 알겠다. 산기슭의 향기로운 오두막 한 채와도 같은 이 난 '시로 여는 아침'이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오는 꽃으로 피어나길 기다려본다.
손택수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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