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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첫 美연방 하원의원 김창준의 숨겨진 정치 이야기] <42> 미국의 검찰과 한국의 검찰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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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첫 美연방 하원의원 김창준의 숨겨진 정치 이야기] <42> 미국의 검찰과 한국의 검찰 I

입력
2009.01.14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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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미국 검찰 제도의 가장 큰 차이는 한국이 사법시험을 치른다는데 있을 것이다. 미국의 경우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시험(평균 합격률70~75%)에 통과하면 변호사가 되고, 검사는 이들 가운데 원하는 사람이 지원할 수 있다.

변호사 자격시험은 각 주가 독립적으로 실시하기 때문에 주를 옮길 때는 변호사 자격시험을 다시 봐야 하는 경우도 있다. 캘리포니아나 뉴욕 같은 주의 변호사 자격은 다른 주에 가도 그대로 인정해 주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반면 한국은 검사가 되려면 일단 사법시험 통과가 필수적이고, 더욱이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소수만이 검사가 될 수 있다. 사법시험 자체가 어려운 시험인데다, 검사는 시험 합격자 중에서도 소수만이 임용되다 보니 한국에서 검사는 그야말로 엘리트로 꼽힌다.

이상한 것은 새 검찰총장이 임명되면 그 새 총장의 사시 선배들은 모조리 사표를 내는 전통이다. 미국에는 사시 제도가 없으니 당연히 이런 관행도 없다.

관선변호인 (Public defender) 제도도 한국과 미국 간에 크게 다른 점이다. 미국에서는 돈 없는 피고인에게 정부가 무료로 제공하는 관선변호인을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대개 관선변호인을 징검다리로 생각해 2, 3년 경험을 쌓은 뒤, 장래가 촉망되는 다른 자리로 옮겨가기 때문에 평판이 높지 않은 건 어쩔 수 없다.

관선변호인 뿐만 아니라 정부 소속 변호사들도 대체로 공무원 생활을 청산하고 개인 변호사 사무실에 파트너로 가길 원한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난다. 최고 수준의 변호사들은 대부분 정부에서 일하기 보다는 민간 부문에서 유명한 피고인의 변호를 맡기를 원하며, 그 때문에 검찰에 대한 이미지는 한국처럼 높지가 않다.

미국의 검찰과 변호사 제도에 대해 가장 설명하기 쉬운 예가 오 제이 심슨(O.J. Simpson)이 관련된 살인 사건이다. 심슨은 1947년 7월 9일 생으로 나는 그를 1968년께 남가주대학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캠퍼스에서 처음 만났다. 그 뒤로 몇 번 더 그를 캠퍼스에서 다시 만났지만 그 당시 난 이미 대학원에 다닐 때라 가까이 볼 기회는 별로 없었다.

1967년 내가 졸업반 4학년 때는 마이크 개럿(Michael Garrett)이 USC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미식축구 선수였다. 1968년에 접어들면서 심슨은 미식축구 스타가 되었고, 그 해에 저 유명한 하이스맨 (Heisman) 트로피도 수상하는 등 남가주대학 미식축구 역사상 가장 유명한 스타로 탄생했다.

1973년에는 NFL에서 한 시즌에 공을 들고 상대방 방어를 뚫으면서 2,000야드를 돌파한 프로 미식축구의 영웅으로 등장했고, 나중에는 할리우드 배우로도 나선 그야말로 수퍼스타였다.

이렇게 유명한 스타가 1994년 살인사건으로 하루아침에 인기가 땅에 떨어지고 환갑이 넘은 최근엔 라스베이거스에서 절도 및 유괴범으로 체포돼 2008년 12월 5일, 결국33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하지만 여러 가지를 감안해 9년 징역에 가석방으로 감형시킬 것이라는 예측들이 나온다.

그럼 심슨 살인사건은 어떻게 전개되었나.

1994년 6월 12일 심슨의 백인 부인 니콜 심슨의 시체가 그녀의 아파트 앞 뜰에서 발견됐다. 시체 옆에는 그녀의 테니스 코치인 로랑 골드먼이란 젊은 남자의 시체도 같이 있었다. 둘 다 칼로 찔린 흔적이 있지만 무기는 찾을 수 없었다.

심슨은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에선 배심원을 선정하기로 하고 결국 법정투쟁이 시작됐다. 배심원은 모두 12명으로 8명의 여자와 4명의 남자였고 공교롭게도 이들 12명 중 8명이 흑인이었다.

배심원은 미국 사법제도의 특징이다. 한국에는 없는 이 제도로 배심원은 평범한 시민 누구나 될 수 있다. 실은 제비로 뽑기 때문에 누가 선택될지도 알 수 없다.

나도 여러 번 뽑혔었지만 직장에서 나올 수가 없었고 만일 참석하더라도 직장에선 임금 지급을 따로 하지 않기 때문에 경제적인 이유로 거절했었다. 하지만 계속 똑같은 이유로 거절할 수는 없다.

배심원 선택도 그리 간단한 게 아니다. 최종적으로 배심원 12명을 뽑는데 적어도 100 명의 후보 가운데서 선출한다. 검찰과 변호인단은 함께 참석한 자리에서 배심원 후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한다. 양측에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탈락시킬 수 있다.

예를 들면 배심원 한 사람이 심슨의 스포츠팬이라면 검찰 측이 이 사람을 탈락시킬 것이고, 반대로 배심원 후보자가 과거 경찰 출신 이라면 변호인단 측에서 탈락을 요구할 것이다. 과거 경찰관은 심슨을 범인으로 미리 예단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나도 서너 번 배심원 후보로 참석한 적이 있었다.

한번은 민사소송이었는데 양쪽 원고와 피고 간에 합의를 봐 소송이 취소되는 바람에 그냥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고 나머지 두 번은 내가 과거 공화당 출신 의원이었다는 이유로 피고측이 범죄에 대한 내 보수적 견해를 우려해 나를 탈락시켰다.

심슨 케이스도 며칠을 두고 100 명 이상을 인터뷰한 끝에 마지막으로 양쪽이 합의를 본 후보가 결국 12명. 이 중 8명이 흑인, 4명이 백인이었다. 마지막 12명과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예비후보 몇 명까지 뽑는데 꼬박 4개월이 걸렸고 이 때가 1994년 11월 3일이다.

검찰 측은 그 당시 별로 알려지지 않은 여검사 마셔 클라크와 크리스토퍼 다덴을 임명했고 피고 측은 저 유명한 흑인변호사 쟈니 쿠크란과 역시 잘 알려진 리 베일리를 선임했다.

이 두 변호사는 최고로 유명했고 재판에서 패배한 적이 별로 없어 언론은 이들을 드림팀 (Dream Team)이라고 불렀다. 이 때부터 드림팀이란 단어는 미국에서 일상생활 용어가 됐다.

하지만 변호사 비용이 너무 비싸서 웬만한 사람은 이런 드림팀을 채용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결국 법의 정당성(justice)을 돈으로 사는 게 아니냐는 비난도 높았다.

심슨 공판은 처음부터 끝까지 상세히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됐고 시청률은 사상 최고였다. 심슨의 아름다운 백인부인과 그의 정부인 테니스 코치를 심슨이 아니면 누가 살인했단 말인가?

그 당시 미국인들의 80%는 심슨이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검찰들은 심슨의 유죄를 배심원에게 설득시키는데 실패했고 드림팀의 조직적인 추궁으로 결국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이 문제는 결국은 워싱턴에 있는 미 의회에까지 파장을 몰고 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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