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鄕愁)는 아름다운 정서입니다. 결코 화려하지는 않지만 지친 나그네살이를 달래주는 깊은 그리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향수를 읊는 많은 시들이 있고, 또 그만큼 많은 향수를 담은 노래들이 불립니다. 그 시를 읽을 때면, 그리고 그 노래를 부를 때면, 사람들은 애틋한 아픔 속에서 감춘 눈물로 자신의 지치고 때 묻은 '영혼'을 달래고 맑힙니다. 처음이 지닌 순수, 그리고 가능성만으로 충일하던 시공(時空)을 새삼 숨 쉽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 '객지'의 나를 위한 형언할 수 없는 위안이고 힘입니다. 향수는 이렇게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향수는 불안한 정서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이미 떠나온, 그래서 이제는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잃은 시공'에 대한 아쉬움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떠나온 곳이라 할지라도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이미 지난 시간이지만 다시 거스를 수만 있다면, 우리는 향수를 읊조릴 것 없이 아예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쓰면 됩니다. '나 돌아가겠노라!'고 큰소리치면서 훌훌 다 버리고 떠나온 곳으로 되돌아가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어쩌면 처음 시간도 상당히 되살아 날지 모릅니다. 적어도 정서적으로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향수는 그러고 싶지만 속절없는 정황 속에서 가슴 바닥에서부터 솟는 절망을 애써 다듬어 뿜는 절규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향수는 '본디 있던, 그러나 이제 없는 시공(鄕)을 그리워하는 근심(愁)'이고, 돌아갈 수 없는 시공에 '되돌아가려는(nostos) 아픔 또는 질병(algia)'입니다. 향수는 우리에게 또한 이렇게 있습니다. 건강하지 않은 정서이기도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른바 '향수 타령'은 시대착오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과장한다면 이제 고향은 없습니다. '아직은'이라고 힘주어 말하면서 명절에 고향을 찾는 '귀성객'의 이동을 예로 들 수 있고, 민족이나 조국을 이야기하면서 세상의 틀이 바뀌는데도 그것들이 지닌 지워지지 않는 도도한 의식을 예로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러한 '공간과 시간의 퇴색'입니다. 새로운 수렵채취시대라고 해야 더 적절할 만큼 사람들은 '먹이'를 찾아 온 세상을 떠돕니다. 현대인을 '새 유목민'으로 일컫는 데에 근본적인 이견을 달기는 어렵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중심의 산재(散在)현상'이 그러합니다. 떠남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와 시간, 그래서 되돌아가야 할 곳으로 확인해야 하는 자리와 시간을 '중심'으로 여긴 세월이 있었습니다. 수렵채취시대의 흔적도 그러합니다. 먹이를 얻으면 그것을 가지고 되돌아가야 할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곳은 앞도 뒤도, 좌우도, 위도 아래도 갈래져 퍼지는 처음 자리와 시간, 그래서 그 온갖 시공에서 되돌아오는 마지막 자리와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공이 다름 아닌 '중심'이었습니다. 삶은 떠나야 했던 시간과 자리, 그리고 되돌아가야 할 그러한 것을 중심으로 펼쳐졌고 또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중심은 절대적인 공간이었고 시간이었습니다. 그러한 중심이 여럿이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회로부터 농경사회로의 진전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중심에서의 안정을 누리는 '정착'이 수렵과 채취를 위한 불안정한 '추격'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농경시대조차 두어 차원 넘어선 '다른 삶'의 모습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정착은 안정이 아니라 오히려 퇴행입니다. 움직임은 불안한 요동이 아니라 삶의 본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떠나온 처음자리와 시간이 따로 없습니다. 당연히 돌아가야 할 처음 자리와 시간도 있지 않습니다. 움직임의 어느 자리든 어느 시간이든, 전통적인 개념을 그대로 사용한다면, 그곳과 그 때가 그대로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중심 아닌 시공이 없습니다. 배타적으로 '그 때 거기만' 중심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희화(戱畵)라면 몰라도 전혀 현실성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정황 속에서 향수를 운위하면서 그 정서에 자신의 의식을 실어 펴는 일은 어색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현실적합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이 시간이든 공간이든 무릇 '잃은 것에의 아쉬움'을 버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 아쉬움에 거의 본능적인 공감을 지닙니다. 그 아쉬움은 심미적(審美的)인 후광조차 지닙니다. 더 나아가 '상실에의 회상'은 온전한 삶을 위한 규범적인 당위성조차 지닙니다.
감성적인 아름다움에 더해 그 아픈 그리움은 윤리적인 것으로 자리를 잡는 것입니다. 자연히 향수에 대한 이러한 '인식과 판단'은 향수를 정서의 차원에 두지 않습니다. 그것은 향수가 담고 있는 그 때 그곳을 지금 되살려야 한다는 실천적 동기를 충동합니다. 이른바 '복원(復元)의 문화'는 이렇게 출현합니다. 되 파고, 되 짓고, 되 읊습니다. 하는 일이 모두 그것 뿐입니다.
하지만 복원은 비현실적인 개념입니다. 회귀와 역류는 삶의 실제 속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복원은 가장 드높은 이상을 실현하는 것으로 일컬어집니다. 향수를 치유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경우조차 실은 사실일 수 없습니다. 복원은 잃은 시공의 재귀(再歸)가 아니라 그렇다고 여기는, 또는 그렇다고 풀이하는, '편리한 환상'을 짓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향수에서 비롯한 '복원의 규범' 속에 푹 빠져 있습니다. 미래를 그리는 상상력에서 비롯하는 '창조의 규범'은 뚜렷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정치가 그러합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그러합니다. 우리의 의식도 대체로 그러하다고 묘사하고 싶습니다.
지녔었는데 빼앗긴 것, 또는 빼앗겼던 것, 아니면 가졌었는데 잃은 것, 또는 잃어버렸던 것에의 향수가 쏟아내는 한풀이가 아니라면 지금의 실상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새로 지을 것에 대한 간절함은 잃은 것에 대한 아쉬움 속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향수의 미학은 창조의 당위조차 질식 시키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자기기만의 구조가 이러합니다. 내일이 없습니다.
신화는 처음 비롯함의 시공의 완전함을 창조를 통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신화도 그 처음에 대한 향수를 요청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잃어버린 처음의 완전성을 되찾는 것은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둘러 지금을 끝내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향수는 '뿌리인 처음'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잃은 어제'에 대한 아련한 감상(感傷)입니다. 그런 한 향수는 종말의 실현에 장애가 됩니다. 질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종말이 없으면 처음이 없습니다. 창조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순간과 자리가 중심인 오늘의 현실에서는 모든 순간과 자리가 종말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복원이 아니라 중창(重創)이어야 합니다. 향수는 분명히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편리한 환상입니다. 그것으로 위로 받는 현실은 결코 건강하지 않습니다.
정진홍 이화여대 석좌 교수 · 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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