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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권력 앞에 당당한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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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권력 앞에 당당한 영혼

입력
2009.01.14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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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은 영어권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존 밀턴의 탄생 400주년이 되던 해였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작년 한 해 내내 시인의 탄생을 기념하는 갖가지 행사로 떠들썩했다. 그러나 '어륀지' 정부를 탄생시킨 '영어 몰입 국가'의 반응은 시종일관 침묵이었다. 영어를 오로지 '먹고 사는 일'에만 결부시키는 천격(賤格)이 경이롭다.

'혁명 논객' 존 밀턴의 기개

밀턴이 40대 중반에 앞 못 보는 장님이 됐고, 그의 '실낙원'이 만년에 실명 상태에서 집필했다는 것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밀턴이 8개 국어에 능통한 당대 일급의 석학이자, 청교도 혁명에서 찰스 1세의 처형을 적극 옹호한 혁명 논객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왕권신수설이 보편화한 시대에 왕정 폐지의 공화주의를 주장한다는 것은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가공할 일이었다.

혁명은 결국 실패로 끝났고, 죽은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1660년 복귀함으로써 왕정 복고가 이루어진다. 밀턴은 하루 아침에 반역자가 되어 감옥살이까지 하는 수난을 겪지만 새 정부의 관용정책 덕분에 다행히 목숨만은 건진다. 그 뒤 밀턴은 내부적 망명자 신세가 되어 서사시 집필에 전념하게 되는데, 이 때 새 정부는 넌지시 밀턴에게 유혹의 손길을 뻗친다. 정부 입장에서 '악명 높은' 밀턴을 전향시켜 국왕 편으로 끌어들이는 일은 비할 데 없는 쾌거요, 밀턴이 과거에 했던 모든 주장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 무렵 밀턴의 처지는 몹시 궁했다. 평생 모은 재산을 증권으로 갖고 있다가 왕정 복고의 혼란 통에 대부분 날려버렸고, 부양해야 할 아내와 어린 세 딸이 있었다. 늙은 장애인 신세였다. 그러나 밀턴은 국왕의 제안을 일거에 거절한다.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밀턴의 자택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사형당한 찰스 1세의 둘째 아들이자 국왕 찰스 2세의 동생인 요크 공 제임스였다(나중에 제임스 2세가 된다).

요크 공은 어느 날 찰스 2세에게, 장님 밀턴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한번 만나봤으면 한다고 승낙을 구했다. 왕은 동생의 호기심을 막을 의사가 없음을 밝히며 허락했고, 얼마 후 제임스는 밀턴의 거처를 개인적으로 방문했다. 대화를 나누던 중 제임스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밀턴의 실명이 혁명 활동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손님의 무례한 질문에 밀턴은 답했다.

"만일 전하께서 저의 실명을 하늘이 진노하신 징후라고 생각하신다면 전하의 부친이신 선왕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습니까? 전하의 말씀대로라면 하늘은 저보다는 부친께 훨씬 더 불쾌하셨던 게지요. 저는 두 눈을 잃었을 뿐이지만 선왕은 머리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밀턴은 "나의 실명이 하늘의 벌이라면, 당신 아버지는 얼마나 큰 천벌을 받았기에 처형장에서 목이 잘렸느냐"고 반문한 것이다. 권력에 굴종하지 않는 시인의 기개가 놀랍다.

천격 엘리트 넘치는 현실

이명박 정부 들어 '영혼 없는'이라는 수식어가 유행이다. 평소 대운하 건설에 반대하던 한 대학교수는 소신(?)을 접고 적극 찬성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18대 총선 때 '뉴타운' 거짓 공약을 한 혐의로 고발된

정몽준 한나라당 최고위원에 대한 검찰의 무혐의 처분이 법원에서 뒤집혔다. 혐의가 없다고 했던 검찰만 곤혹스러운 처지에 빠졌다. '정치 검찰' 명성대로 눈치껏 '권력에 줄 대기'를 했으리라는 것이 세간의 평이다.

'역사의 평가'니 '양심의 소리'니 말해봐야 '후세'도 '내세'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에게는 가당찮은 헛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현세'에서만 잘 나가면 그것으로 끝이라 생각하고, 사욕을 위해 기꺼이 공공성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천격의 엘리트가 넘쳐 나는 현실이 부끄럽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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