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량 학살)에 관한 최고의 고전으로 꼽히는 라울 힐베르크(1926~2007)의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전2권ㆍ개마고원 발행)가 한국어로 번역돼 나왔다. 홀로코스트,>
힐베르크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유대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뒤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한 역사학자다. 1955년부터 타계할 때까지 버몬트주립대 교수로 있으면서 홀로코스트를 연구했다.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는 1948년 연구를 시작해 1961년 초판이 발간된 그의 대표작으로, 40여년 동안 개정을 거듭하며 지금까지 10개 언어로 번역ㆍ출간됐다. 홀로코스트,>
이 책은 묘한 시점에 국내에 소개돼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국제 홀로코스트 추모의 날'(27일)을 앞두고, 피해자의 후예들인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아랍의 민간인들에게 무차별 공격을 퍼부으며 수많은 사상자를 낳고 있는 것이다.
힐베르크의 논리 구조에 따르면, 학살이 진행 중일 때 타자들이 일상에 몰두하는 것도 파괴기계의 부품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이 책을 번역한 김학이 동아대 교수(사학)는 역자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이 책의 테제는 악의 일상성이다… 일상적 실천들이 단 하나의 계기, '우리'와 '타자'가 제시되자 자동으로 학살기계로 돌변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방책은 단순하다. 타자화를 막는 것이다."
1,7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은 무려 500만명이 넘는 유대인이 학살될 수 있었던 당시 세계의 '구조'를 담고 있다. 힐베르크의 목표는 단순히 나치의 잔학함을 고발하거나, 자신의 뿌리인 이스라엘의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데 있지 않다.
이 책은 "어떻게 이런 학살이 가능할 수 있었는가"라는 의문을 풀기 위해, 힐베르크가 '파괴기계'(the machine of destruction)라고 이름 붙인 학살 시스템의 작동 원리를 규명한 결과물이다.
힐베르크는 홀로코스트의 본질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 '일상성'과 '무체계'가 그것이다.
홀로코스트는 천인공노할 범죄였지만, 그것이 실행되던 때 학살은 지극히 '일상적인 일들'(everyday practices)이었다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다. '악(惡)의 일상성'이라는 개념은 홀로코스트가 소수의 나치 전범뿐 아니라 모든 독일인, 나아가 세상 전체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을 뜻한다.
김학이 교수는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악의 진부성(평범성)'이라는 개념도 힐베르크의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힐베르크는 실재했던 한 루터파 목사를 예로 든다. '평범한 목회활동을 하던 이 목사는 중앙부처의 교회로 전직된다. 이어서 공안 담당 제국보안청 교회의 담당관이 된다. 그리고 어느 수용소의 소장으로 전근되더니 러시아 전선에서 학살특공대 부대장으로 파견돼, 무수한 유대인을 효율적으로 죽이게 된다.'
힐베르크는 방대한 사료를 분석하고 구조화해, 개개인이 거대한 파괴기계의 부품으로 작동한 그물망을 드러낸다. 행정작업을 맡은 공무원, 기업을 운영하는 사업가뿐 아니라, 힐베르크에 따르면 "그림 그리는 데 몰두했던 피카소와 계속 극본을 쓴 사르트르도" 결국 파괴기계의 부품일 수밖에 없었다.
"수용소 내에서 노동을 함으로써, 학살 업무를 저렴하고 효율적으로 만들어 준 유대인들 또한 파괴기계의 부품이었다"는 것이 힐베르크가 보는 홀로코스트의 진정한 공포다. 그러나 그의 이런 시각은 이 책이 유대인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게 만들기도 했다.
힐베르크가 규정한 홀로코스트의 또 다른 본질은 "뿌리부터 무체계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1941년 나치가 '유대인의 최종 해결'이라는 목표를 세우기 전까지는,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몰랐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애초에 죽일 뜻도 없었는데 결국 대량 학살로 이어졌다는 '참혹한 허무함'이다. 이 책이 출간된 1960년대의 합리주의 풍토에서 받아들여지기 힘들었지만 훗날 진실로 밝혀진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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