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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 기자의 다시, 길을 떠나다] <10> 사진가 정범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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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 기자의 다시, 길을 떠나다] <10> 사진가 정범태

입력
2009.01.13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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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정범태(80)씨는 아직도 서너 대의 카메라를 메고, 전통문화의 현장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 간다.

한국의 사진작가 1세대로서 현역으로 뛰던 시절에는 끝까지 타협을 몰라 '독침'이라고까지 불렸던 그가 안착한 곳은 전통 예인들의 세계다. 최근 발간된 <한국춤 100년-2권> (눈빛)은 그의 카메라가 인간의 내면에까지 삼투했음을 알려준다.

1960년 고대생 피습 사건, 서울역 귀성객 압사 사건 특종사진 등 1960~70년대 꽉 막힌 세상의 확대경으로서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적지않다.

<정범태 사진집> (눈빛)은 그 같은 기억에 대한 집성이었다. 한국 보도사진의 대부로 불리는 그는 자신이 몸담았던 여러 신문사 중 한국일보 재직 시의 기억을 가장 아꼈다.

숨가쁜 역사의 현장에서 예인들로, 이제 그의 렌즈가 응시하는 피사체의 대상은 바뀌었다. 그렇지만 현장을 고집하는 자 특유의 건강성으로 그의 카메라는 발언을 멈추지 않는다.

<판소리> <경서도 명인 명창> <한국의 명무> <춤과 그 사람> (전10권) <우리가 알아야 할 예인 100사람> <한국춤 100년> 등의 사진집은 생동감 넘치는 글과 함께 젊은이들을 무색케 한다 .

- 대단한 근력이다. 일상은 어떠한지.

"2~3시에 잠자리에 들어 5시면 일어난다. 운동도, 보약도 않는다. 가진 게 없으니 관리하는 데 신경 안 쓴다. 아는 게 없는 못난 놈이기 때문에 잘난 척을 안 한다."

­­ - 최근 당신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었다.

"나이 80이 되니 사진집도 내주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내 작품 25점을 구매해 갔다. 국내 사진가로서 그곳에 작품이 소장된 사람은 내가 10번째라 한다. 정기ㆍ특별 전람회도 매년 개최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영월군 동강사진박물관에서 내 사진을 15점 소장, 연 한 차례 전시한다. 요즘은 무대 사진에 집중하고 있다. '춤' 지에 글도 기고하면서, 현장이 있을 때마다 지방에 내려간다. 특히 명인ㆍ명창 사진 찍기는 하루도 거르는 법 없다. 이제 막연하게 예술사진 찍는다는 그런 짓은 하지 않고, 내 작업의 일환으로 해 나가고 있다."

- 우리 고유의 문화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시작됐나.

"나는 1946년부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1950년대 신선회(新線會) 활동을 기점으로 우리나라 리얼리즘 사진의 길을 열었는데, 맨 처음 찍은 게 춤 사진이었다. 인왕산 국사당 적설이(무당)에서 출발, 서울 장안의 내로라하는 판소리, 국악, 춤 등의 명인 줄잡아 100명의 사진을 찍고 기록했다.

특히 승무 인간문화재 이애주씨는 초등학교 시절, 엄마 손 잡고 춤 배울 때부터 아는 사이다. 그 인연은 지난해 11월 '한ㆍ중ㆍ일의 몸짓' 무대까지 이어졌다. 나는 춤과 음악을 분석한 뒤, 사진을 찍는다."

- 한국적인 것에 바탕을 둬야 한다는 생각은 어떻게 생겨났나.

"6ㆍ25 때 피난 가 있던 부산에서 여성국극단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다가 징집됐다. 공병반의 임무를 사진으로 기록하려 중공군 작전권까지 들어갔다가 몇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밀려 내려왔다. 다시 남원에서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 중이던 백선엽 사령부의 문관 자격으로 사진촬영을 했는데, 그 일대 명인 명창들을 일단 카메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 특별한 소명의식이 있었던 듯한데.

"1910년 이후 모든 것이 일본에 예속된 상태에서, 일본의 기생교육기관(권번)으로 우리 전통문화가 유출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위협감을 느꼈다. 리얼리즘에의 확신은 신선회 시절 이후 일관된 것이다. 나는 일반회원으로 입회, 사람을 주요 피사체로 하는 리얼리즘 작업을 계속해 나가다 보니 자연스레 사진기자의 꿈을 갖게 됐다.

동아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에서 열렸던 1회전을 주도했는데, 경치에 치중하던 기성 작가들은 사람을 위주로 한 내 작업을 못마땅해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미국대사관 주최로 사람을 주제로 한 '세계 인간 가족'전이 열리면서, 나는 '앞서가는 사진작가'라는 평을 얻게 됐다."

- 그런데 실제 명성은 신문기자로서 얻지 않았나.

"신문 사진이 곧 리얼리즘 사진일 것이라고 착각한 나는 명동 뒷골목에서 아사히신문이 발행한 사진실기책으로 공부, 신문사에 들어갔다. 1955년 내가 치렀던 시험은 한국 최초로 사진기자를 뽑는 공식 전형이었는데 이후 서울역 귀성객 압사 사건, 고대생 피습 사건 등 특종을 하며 나는 잘 성장해 가고 있었다. 신문기자로서의 대표작 두 편이 그 때 나왔다.

- 신문사를 많이 옮겼는데.

"당시 나는 젊은 혈기로, '독침'이라 불릴 만큼 성깔이 대단했다. 그런데 당시 특종을 하고도 이니셜도 안 나가던 사진기자가 편집국장과 충돌하고 보니 그 조직에 있을 마음이 사라졌다. 내 성질을 못 이겼던 것이다.

사진 특종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죽는 한이 있어도 찍어야겠다는 결심으로 얻은 사진, 둘째 잔머리 굴려 찍은 사진이다. 대판 싸우고 나왔던 그 신문사는 훗날 내게 사진부장 직을 제의해 왔다. 내가 거부하자 이제는 발령이라며 붙잡는데는 별 수 없었다. 3년 일했다."

- 기자로서 기억나는 일은.

"1961년 한국일보로 옮겨 열심히 일했다. 이듬해 4월 전등사 필화 사건을 사회면 톱으로 실었는데, 반공법 위반으로 실형 2년에 처해졌다. 그 안에서의 1년 동안 몇 년에 맞먹는 공부를 했다.

재무장관, 미 CIA 장교, 언론사 간부 등 서대문형무소에서 다 만났다. 그곳의 운동 시간은 세상공부 시간이었다. 나와서 '주간한국' 창간 멤버로 1년 일했다. 이후 한국일보 등에서 사진기자 일을 계속하다 1986년 아시안게임 때 정년을 맞았다."

"40년 6개월 사진기자로 숨가쁘게 역사현장 누벼사물서 받은 느낌 그대로 형상화 하는 것이 사진후학들 항상 사회와 역사의 흐름 염두에 뒀으면… "

- 사진기자로서의 세월을 요약한다면.

"통산 40년 6개월 사진기자로 뛰었다. 데스크는 하지 않고 현장에서만 뛰었던 세월로, 한국서는 전례 없던 일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리얼리즘 사진을 신문사진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사진작가로서의 작업은 주관이 강하나, 신문은 100% 객관을 요구하는 것이다."

- 스스로의 사진예술관을 말한다면.

"시인, 작곡가가 영감이 떠오를 때 창작을 하듯 사진 역시 사물로부터 받은 느낌을 그대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순간의 포착을 위해 나는 내가 머릿속에 그린 것과 유사한 자리를, 몇 년이고 가서 기다린다. 흔히 사진과 그림 등의 제목으로 쓰이는 '무제'는 무책임의 극치다.

나는 먼저 제목을 떠올리고 현장에 가서 끈질기게 관찰하고 그것을 형상화한다. 고발의 형식으로 시작해, 당대의 사회상을 담는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사람들과 친숙해져서 사람들을 흥겹게 하고 감화시켜야 한다."

- 후학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특강 형식으로 상명대, 한양대, 용인대 등지에서 후배들과 만난다. 엊그제 대학원생 30여명한테 두어시간 했던 강의에서는 '역사성과 시대성을 제외하면 별 것 없다'는 요지의 말을 들려주었다. 혹시 신문사 들어가 일하게 되면 잔머리 굴리지 말고 사진 찍어야 역사와 사회가 바뀐다는 말도 했다.

실험적으로 배운 것들을 자기 것인 양 발표하는 해외유학파들의 사진을 보면, 좀 더 정직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된다. 사진 교육은 아직 사대주의를 못 벗어났다. 우리나라 교육에 아무 도움 안 되는 서양 지식의 주입이기 일쑤다."

- 주목할 만한 후배가 있나.

"아직 안 보인다. 사진의 본질을 망각한 채 사대주의로만 흐르고 있다. 우리 것에 대한 무관심도 큰 문제다."

● 우리 춤 연구 63년에 '귀명창'

"63년을 자나 깨나 우리 춤 연구 했는데, 그런 것 안 보이면 병신이죠."

국악을 오래 들으면 '귀명창'이 된다. 정범태씨가 바로 귀명창이다. 지난해 꼬박 KBS1 FM에서 '흥겨운 한마당'을 1년 동안 진행했고, 국립극장 소식지 ''미르'에 판소리, 음악, 명창 등을 주제로 읽을거리를 연재한 세월이 3년이다. 그는 "옛 노트 정리한 것만 해도 앞으로 쓸거리가 무궁무진하다"고 했다.

박정현, 송범 등 1, 2년 새 죽은 명인들의 뒤치다꺼리가 자신의 몫이라 믿는다. <한국 명인 명창> <경서도 명인 명창> <춤과 그 사람> 등 정씨의 저작은 살아있는 사진과 맛깔나는 글로 그의 존재를 굳건히 했다. 공옥진의 병신춤을 '해학춤'이라 이름을 바꾼 것도, 춤의 순한글 용어인 '지숨'을 발굴한 것도 그다.

그의 예인 사진은 밀도 깊은 사진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는 "나는 사진 찍을 때 표정이 아니라, 장단의 음양과 음악을 들으며 찍는다"고 예인 사진촬영의 비법을 전했다. 그의 사진에서 표정 너머로 음악이 들리고, 혼이 느껴지는 이유다.

학계의 오만도 숱하게 보았다. "속악 쪽의 기록이란 거의 전무해요. 학자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당시 신문기사가 전부인데, 다 꿰고 있는 것처럼 말하다니 참 뻔뻔하구나 생각도 하죠." 사실 그는 기록의 보고다.

최근 민속박물관의 세미나 '임방울류 정철호의 적벽가 전수'에 초청됐던 일은 그 자신의 전문성 덕이다. "임방울이 실제 창하는 사진을 갖고 있는 사람은 내가 유일하거든요." 1955년의 창경원 공연 장면이다.

그는 현재 소리, 음악, 춤 등의 달인 50여명을 잡아 <아시아를 움직인 광대> 를 기획 중이다. 지금은 선정 작업 중인데, 이광수 안숙선 이춘희 원장현 등의 자료를 정리하고 있다. 정인숙 강은수 김영수 등 젊은 사진가들과의 소통도 계속해 나가고 있다.

장병욱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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