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정종섭의 論衡] 다시 품격을 생각해 보자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정종섭의 論衡] 다시 품격을 생각해 보자

입력
2009.01.13 00:02
0 0

소치(小癡) 허련(許鍊ㆍ1808~1893). 그 이름만 들어도 조선 수묵화(水墨畵)의 적통(嫡統)이요, 호남 화맥의 종장(宗匠)이다. 광해군 때 역모죄로 몰려 유배된 임해군을 따라 진도로 온 그의 선조가 가문을 연 그곳에서 태어나 헌종 때 그림으로 황금기를 누리다가 만년에 진도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열었다. 그 운림산방에서 미산(米山) 허형(許瀅), 남농(南農) 허건(許健) 등 대대손손 허씨가 수묵의 맥이 이어 내려와 오늘날까지 허씨 가문의 화맥은 한국 수묵화의 근본 줄기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시서화는 한 뿌리의 학문·예술

허문(許門)의 이런 수묵화들이 운림산방을 출발하여 지난해 국립광주박물관의 전시에 이어 올 초부터 우리의 마음과 눈의 품격을 올려준 예술의전당 전시까지 오면서 21세기에 세계화를 부르짖는 우리네 삶의 속살과 숨결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만든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 말도 집어 던져버리고 영어를 배운다 중국어를 배운다 하며,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하여 앞뒤 가리지 않고 아우성이지만, 개인의 삶이나 나라의 살림살이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의 정체의식이며, 삶의 중심을 잡아 지속 가능하게 나아가는 것이다. 당장 눈 앞의 먹고 사는 것보다는 우리의 삶의 토양이 무엇이며 어디에서 자양분을 얻어 간단(間斷)없는 삶을 살 것인가 하는 점이다.

수묵은 단순히 그림이 아니다. 이는 서화동근(書畵同根)이라고 하듯이, 동양에서는 서예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고, 서(書)와 화(畵) 역시 시(詩)를 떠나 존재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 역사에서는 학문을 하든 정치를 하든 항상 시서화는 함께 했다. 학문과 문학과 예술이 함께 어울리는 삶 속에서 자연과 사물의 이치를 배우고 품격과 격조도 배워 이를 정치, 경제, 외교, 국방 등 나랏일에 응용하는 것이다.

하나만 잘 하면 평생 먹고 산다고 떠벌리며 혹세무민(惑世誣民)하던 것이 바로 어제 일인데, 벌써 융합학문을 해야 한다고 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다양한 분야가 어울리고 여러 지식이 혼융된 융합적 지식 속에서 미래의 살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역사를 보면, 이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한참이나 잘못된 길을 가던 우리이기에 이제는 이 말조차 새삼 솔깃하게 들리는 것이다. 우리 역사를 만들어낸 선조들을 한 번 보라, 융합의 길을 가지 않은 이가 있는가를. 이황, 이이, 조광조, 조식, 김인후, 기대승, 이익, 정약용, 박제가, 정제두, 최남선, 이승만, 김범부 등등.

소치의 스승인 추사 김정희 선생만 보아도 역사, 문학, 철학, 역학, 천문학, 종교 그리고 정치 등에 모두 뛰어났다. 소치가 경향을 오르내리며 영향을 받은 권돈인, 신헌, 김흥근, 민영익, 대원군 등도 마찬가지다. 이들을 만나면서 소치의 그림도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를 갖추게 되고, 그 결과 품격 높은 수묵화의 경지를 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운림산방 사람들의 수묵화를 보는 것은 여러 가지 점들을 되짚어 보게 만든다. 이미 우리 곁을 잘 살펴보면, 우리의 수묵화와 서예의 오랜 전통은 한옥과 함께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에 녹아들어 있고,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신에 씨줄과 날줄로 엮어져 있다. 이러한 바탕이 있기 때문에 서양의 달리나 미로, 그리고 리히텐쉬타인의 붓질과 구도도 어색하게 여겨지지 않고 우리 눈과 정서에 익숙하게 보이는 것이다.

한국서화관·도자관부터 조성을

이치가 이러하다면, 서양의 도시에서 흔히 보았던 한물 간 디자인을 가져와 도시를 도배질하는 일에 몰입할 것이 아니라, 경복궁과 광화문 앞에 새로 들어설 광장에 최고의 건축가가 설계한 한국서화관과 한국도자관을 세우는 것을 생각해볼 일이다. 이것이 한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수준 높은 문화와 역사를 전해주는 것이며, 이런 선조들을 이어가는 우리의 모습을 당당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서화는 물론이거니와 나라나 사람도 품격을 잃으면 천해지는 법이다.

정종섭 서울대 교수ㆍ새사회 전략정책연구원 원장

<저작권자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