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럿(pilot) 프로그램, 방송가의 비정규군이다. 한 번 전파를 타고 시청자들의 반응이 좋으면 정규군으로 편성되지만, 시청률이 썰렁하면 곧바로 잊혀진다.
방송사 입장에선 큰 돈 들이지 않으면서 정규 프로그램의 실패 위험도를 줄일 수 있는 편성 전략이다. 경기불황 속의 방송국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파일럿 프로그램의 전진배치가 늘고 있다.
■ 살아남느냐 잊혀지느냐
파일럿 프로그램 제작에 적극적인 곳은 SBS와 MBC. 지난해 가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이후 경기가 급속도로 냉각되면서 파일럿 프로그램을 잇달아 내보내고 있다.
SBS는 예능프로그램 '연애시대'와 '좋아서'를 추석연휴 특집으로 방송한 데 이어 '퀴즈쇼! 승승장구'와 영상블로그를 표방한 'REC' 등을 방송하며 시청자들의 반응을 살폈다.
지난달 31일엔 이현우와 알렉스가 진행하는 요리프로그램 '대한민국 쿡'을 내보냈다. 이중 '연애시대'와 '좋아서'는 정규 프로그램으로 신분 상승을 했으나 나머지 프로그램은 앞날을 기약하지 못하고 있다.
MBC는 지난 연말 집중적으로 파일럿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퀴즈프로그램 '퀴즈쇼 희망뱅크'와 토크쇼 '슬로토크 악어', 예능프로그램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친친'이 선을 보였으며 이중 '친친'이 정규 프로그램으로 살아 남았다.
이창태 SBS 편성팀장은 "파일럿 프로그램은 정규 프로그램과 달리 기회비용을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며 "불황기에 더욱 많은 파일럿 프로그램이 방송을 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인기 프로그램의 등용문
정식 프로그램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신세지만 파일럿 프로그램이 인기 프로그램의 등용문 역할을 한 지는 오래다. IMF사태 때인 1999년 9월 첫 방영된 이후 개그프로그램의 대명사로 자리잡은 '개그콘서트'가 대표적이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인기 코너 '우리 결혼했어요'도 지난해 설 특집용으로 시청자와 첫 만남을 가진 프로그램이고, MBC 예능프로그램 '황금어장'의 '라디오스타'도 당초는 파일럿 프로그램이었다.
지난주 12.8%(AG닐슨미디어리서치 조사)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절친노트'도 지난해 추석연휴 특집으로 방송됐다가 가을 프로그램 개편 때 정규방송으로 진입했다. KBS2의 인기프로그램 '미녀들의 수다'도 2006년 추석연휴 특집이었으나 이제는 매주 월요일 안방을 찾는 장수 프로그램이 됐다.
파일럿 프로그램이 잇달아 히트작으로 변신하면서 응원군도 늘고 있다.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KBI)은 올해 파일럿 프로그램 제작비로 지난해보다 3배가 넘는 35억 4,000만원을 집중 지원할 예정이다.
■ 기존 프로 아류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최근 쏟아지는 파일럿 프로그램들은 '1박 2일' 류의 리얼 버라이어티쇼이거나 불황기의 대표적 효자 프로그램으로 꼽히는 퀴즈쇼가 대다수여서 기존 프로그램의 아류에 그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실험성 넘치는 제작을 통해 방송의 매너리즘을 일소하고, 새로운 포맷 개발을 도모해야 하는 파일럿 프로그램의 당초 취지를 외면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 방송사 관계자는 "경제성만을 고려한 파일럿 프로그램 편성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며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프로그램 제작에 적극 나서야 불황도 극복할 수 있다"고 꼬집었다.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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