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이영성 부국장 겸 정치부장
_무법 천지였던 지난 20일간의 국회를 평가해 주시지요.
"입법부 수장으로서 면목 없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모든 국회의원들이 가슴에 손을 얹고 진지하게 반성하는 계기가 돼야 합니다. 국회가 TV에 나오면 아이들이 볼까 꺼버린다고 하더군요. 그나마 여야 협상 타결로 국회가 파국을 면했다는 것이 조금은 위안이 됩니다."
_여당의 직권상정 요구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하실 말씀이 많을 것 같습니다.
"직권상정은 법안을 처리할 수 있는 다수당의 정당한 권리를 소수당이 침해했을 때 부득이하게 취하는 예외적 조치입니다. '조자룡 헌 칼 쓰듯' 마구잡이로 직권상정 권한을 휘두를 순 없습니다. 법안을 사사건건 직권상정 한다면 일당독재 국가가 되는 겁니다. 소수당은 존재 이유가 없어지지요.
직권상정 권한을 행사하려면 세가지 정당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우선 국민을 위한다는 내용적 정당성, 둘째 민주주의의 핵심인 절차적 정당성, 셋째 국민적 정당성이 있어야 합니다. 내용과 절차의 정당성을 가졌다 해도 국민이 승인해 주어야 합니다. 지난해 12월 예산안 부수법안은 세가지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직권상정을 결정했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도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직권상정하기 어렵습니다.
여당은 경제살리기를 위해 그토록 시급하고 중요한 법안들이었다면 왜 진작 국회에 제출하지 않았습니까. 특히 크리스마스 전날 수정안 형식으로 법안을 제출한 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직권상정을 해달라고 했는데, 정당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절차와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국회는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입니다. 생산성만 강조한다면 유신시대로 되돌아가야 할 겁니다. 유신 시대는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나요."
_한나라당 일각에선 '의장이 자기명예만 따지느냐'는 비판도 나왔습니다.
"나는 한나라당 출신임을 잊지않고 또 한나라당 정권의 성공을 바랍니다. 국회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법으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상당부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정당한 과정을 밟아서 해야 합니다. 직권상정을 하지않은 것이 장기적으로는 한나라당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내가 '다른 생각'이 있어 국민지지를 받으려고 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각한 자기 오류입니다. 직권상정 거부가 국민지지를 받는 행동이라면, 법안을 밀어붙이는 것은 국민이 납득할 수 없는 행동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 아닙니까."
_국회의장에게 무리한 직권상정을 요구하는 것은 국회를 통법부로 보는 인식이 남아 있기 때문 아닐까요.
"세계 경제위기를 맞아 이명박 대통령이 추진하는 정책은 적절하고 필요합니다. 대통령을 받치는 세력은 청와대에도, 정부에도, 당에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생각이 다 같을 순 없습니다. 행정부엔 행정부 방식이 있고 국회엔 국회 방식이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한 여권 내부의 대화가 더 많이 필요합니다. 나도 여당 시절 초ㆍ재선 의원을 지냈습니다. 정치적 입장은 같이 했지만 정책에 대해선 야당보다 따끔하게 지적했습니다. 정책엔 100점이 있을 수 없으니까요."
_법안 정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친정으로부터 오해 받고 일부 언론에서 배신자다, 배은망덕하고 우유부단하다는 인격적 모욕을 할 때 고통스러웠습니다. 한국의 국회의장은 미국 영국 등 선진국 국회의장과 많이 다릅니다. 책임은 똑같지만 권한은 너무 없습니다. 의장을 인격적으로 비방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없어져야 할 풍토입니다.
질서유지권을 발동한 뒤 사흘간 기다리며 집행을 하지 않자 여당에서 엄청나게 비판을 했습니다. 하지만 여야 협상이 진행 중인데 어떻게 질서유지권을 집행하겠습니까. 협상을 깨라는 겁니까. 질서유지권 발동은 민주당 본회의장 점거의 불법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_본회의장 점거나 해머 동원을 막을 제도적 방법은 없을까요.
"소수야당이 저항할 권리는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저항방법과 강도, 시기 등은 국민이 동의하는 범위 안에 있어야 합니다. 지난해 12월18일 국회 외통위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상정을 놓고 국회가 시끄러웠을 때 마침 호주 상원 의장과 접견을 하고 있었습니다. 외통위 회의실이 의장실 바로 위층인데, 너무 창피했습니다.
의장으로서 국회의 불법, 특히 폭력엔 단호하게 대처하겠습니다. 이번 폭력 사태와 관련한 고소ㆍ고발은 어떤 경우에도 취하하지 않을 겁니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에 단호하게 대처하겠습니다. 또 60명밖에 안되는 국회 경위로는 폭력을 막을 수가 없기 때문에 국?경위를 증원해야 합니다. 경위와 방호원들이 몸을 다쳐가면서 법을 집행한 데 대해 고맙다는 뜻을 전하고 싶습니다."
_차제에 국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요구가 많습니다.
"반드시 고쳐야 합니다. 국민적 정당성을 얻지 못하는 행위를 엄격하게 법으로 제한해야 합니다. 하지만 국회법 개정 문제를 교섭단체끼리 논의하니 정치적 유불리만 따지게 됩니다. 의장이 재량권을 갖고 개정 방향을 정한 뒤 여야에게 찬반만 묻는 식으로 해야 합니다."
_외통위 FTA 비준안 상정 때 여당이 상임위가 열리기도 전에 질서유지권을 발동한 것이 사태의 원인이라고 야당은 주장합니다.
"지엽말단적 논리이자 자기합리화입니다. 그럼에도 박진 외통위원장이 상정을 하지 않고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이번에 못하면 다시 못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겠지만, 한 박자 늦추었다면 국민들이 상정의 불가피성을 읽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_여야 합의문 중 '합의 처리하도록 노력한다'는 문구가 또 다른 불씨가 될 것 같습니다.
"정당 간 합의란 그야말로 정치적 합의입니다. 교섭단체 회담 때 어떻든 협상을 타결시켜야 한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여야에게 '합의 정신만 살리면 된다'고 했습니다. '예산안 처리 시한을 규정한 헌법도 안 지키면서 합의문 자구에 얽매이느냐. 각자 유리하게 해석하면 되지 않느냐'고 했지요. 휴지기를 갖고 여야가 다시 맑은 정신으로 테이블에 앉아 얘기하는 것이 필요해서 입니다. 그 사이에 어떤 법안은 통과시켜야 하고 어떤 법안은 안 된다는 여론의 판단이 나올 겁니다."
_청와대가 섭섭해 하지 않던가요.
"큰 틀에선 다 이해할 겁니다. 숙성도 안 된 법안을 직권상정 할 순 없습니다. 지금부터 진지한 토론을 하자는 겁니다. 우리는 법 만드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그러다 보니 너무 자주 쉽게 고치려 합니다. 시민단체나 언론에서도 의원의 법안 제출 건수나 처리 건수 등 양적으로 국회를 평가하는 것은 지양해야 합니다."
_최근 미 부시 행정부의 자동차산업 구제안이 여당인 공화당의 반대로 무산된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미국의 대통령제든, 독일 영국의 내각제든, 프랑스의 이원집정제든 공통점은 철저한 견제와 균형입니다. 우리도 권력 분산과 책임 정치의 방향으로 갈 것이라 봅니다."
_개헌 논의가 다시 가라앉고 있습니다.
"세계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개헌논의가 쑥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87년 체제와 그 헌법을 어떤 식으로든 개선하지 않으면 나라 미래가 발전적으로 갈 수 없습니다. 어떤 개헌을 할지는 정치권의 문제인데, 현안에 매달리느라 전혀 논의를 하지 않는 점은 안타깝습니다.
의장 산하의 헌법연구자문위 활동이 1월 말 끝납니다. 자문위는 어떤 권력구조가 낫다는 결론을 내리진 않고 대통령제든 내각제든 그에 맞는 권력구조의 내용을 제시할 것입니다. 그러면 결정은 국회와 국민이 하는 겁니다."
_청와대와 내각 개편은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할까요.
"현재 책임을 맡고 있는 분들에 대한 국민의 평가는 다 나와 있습니다. 지금까지 여론의 목소리를 잘 귀담아 듣고 참고해서 좋은 결정이 나오길 바랍니다."
_여야에게 한 말씀 해주시지요.
"여야 모두 숫자 놀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여당은 수(數)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수의 힘으로 밀어붙여 성공한 사례는 없습니다. 야당도 '의석이 3분의1이니 결사대 정신으로 가자'는 식의 '수의 함정'에 빠지면 안됩니다. 국회를 움직이는 두 가지 원칙, 다수결 원리와 소수자 배려가 조화롭게 작동해야 합니다."
■ 그동안 마음고생 불구 끝까지 친정에 '쓴소리'
김형오 국회의장은 친정인 한나라당의 법안 직권상정 요구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아 원망을 들었다. 이를 묻자 김 의장은 "그간 말도 못하고…좀 길게 답해도 되느냐"고 했다. 쌓인 게 많은 듯 했다.
김 의장은 "나도 사람이니까 고통스러웠다"며 마음 고생의 깊이를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국회가 생산성만 강조한다면 유신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이라는 쓴 소리를 했다.
김 의장은 법안전쟁의 와중에서 청와대 전화도 일절 받지 않고 의장 공관을 점거하러 온 민주당 의원들도 만나지 않고 2주 동안 시내 호텔 등을 전전했다고 한다. 그는 "호텔에 일본관광객만 넘쳐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더라"면서 "보안도 잘 지켜지고 호텔장사도 잘 되니 기분이 좋았다"고 씁쓸하게 웃었다.
정리=최문선 기자 moonsun@hk.co.kr
사진=최종욱기자 ju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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