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 아파"를 입에 달고서도 농사 일을 계속하는 팔순의 할아버지가 있다. 그를 30년간 보좌하며 때로는 자가용 역할을, 때로는 농기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온 마흔 살 된 소가 있다.
그리고 막걸리까지 나눠 마시는 둘을 보며 "마누라보다 소를 더 위한다"고 지청구를 하는 할머니까지. 이들 '무공해' 주인공 셋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 '워낭소리'는 어느 극영화 못지않은 감동의 드라마를 펼쳐낸다.
'워낭소리'가 관객과 만나게 된 전 과정도 동작은 느리지만 뚝심 하나는 일품인 소를 닮았다. 외주제작방송 PD인 이충렬(42) 감독이 '워낭소리'를 처음 기획한 때는 2000년. 그는 "하는 일마다 계속 죽을 쑤다 보니 아버지께 죄송했고, 그 마음을 담아낼 수 있는 아버지와 소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딱히 촬영 대상이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감독은 TV프로그램을 만들며 알게 된 전국의 이장과 마을부녀회장들에게 전화품과 발품을 팔았다. 마침내 2005년 경북 봉화군에서 '워낭소리'의 주인공들을 찾았다.
"전화 연락이 와서 가보니 내가 마음 속에 그렸던 쇠락한 고향의 모습이 있었고, 그 고향을 닮은 우리네 아버지가 있었고, 그 아버지를 닮은 쇠락한 소가 있었다."
하지만 다시 제작자를 잡지 못해 1년을 촬영 준비과정으로 보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일상을 관찰하고 그들을 인터뷰했다. 2006년부터 시작한 촬영은 1년 반 가량이 걸렸다.
오랫동안 준비했다지만 촬영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할아버지는 소리를 잘 듣지 못했고, 가끔 하시는 말씀조차 "줏깃소"(말하소) 같은 외국어 수준의 거친 경상도 사투리였다. 카메라만 들이대면 정지 동작을 취하기 일쑤였다.
아무리 설명해도 사진 찍는 걸로 아셨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농사 일에 방해된다며 화를 내곤 했다. 결국 애초 의도와 달리 멀리 떨어져서 찍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더 좋은 화면이 나왔다."
원래 방송용으로 만들어졌던 '워낭소리'가 극장 개봉을 하게 되기까지에도 우여곡절이 있다. "내 마지막 작품"이란 생각에 이 감독은 촬영 장비에 욕심을 냈고, 제작비는 방송국 판매로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워낭소리' 촬영 전 종군 연예인과 사북탄광 광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사전제작 형식으로 만들었다가 다 말아먹었다. 방송사에서 '왜 이런 칙칙한 거 했냐'며 사 가지를 않았다. 울화병까지 얻을 정도로 상처가 컸다.
그런 상황에서 인생의 역작으로 생각하고 준비한 작품이니 당연하게도 고가의 HD카메라를 사용하고 싶었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게 되자 원래 제작자는 손을 들었고 독립영화 프로듀서 고영재씨가 '워낭소리'를 인수하게 되면서 극장 상영으로 방향을 틀었다."
고향인 전남 영암군에서 여전히 농사 일을 하는 75세 그의 아버지도 '워낭소리'를 봤다. 영화를 다 본 뒤 아버지는 좋다 싫다 한마디 평도 하지 않고 현금 30만원을 아들 손에 쥐어줬다. 고생한 스태프들과 술 한 잔 하라고. 이 감독은 "이 영화 덕분에 효도를 좀 했다"고 말했다.
'워낭소리'로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 최우수상인 피프메세나를 수상했고, 15일 개막하는 미국 선댄스영화제 경쟁부문에도 진출한 이 감독은 "워낙 좋은 일이 한꺼번에 와서 감당이 안 된다"고 했다. '워낭소리'를 찍으며 치유됐던 공황장애가 다시 나타날 정도라고도 했다.
"그래도 '워낭소리'가 없었다면 아마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를 찍지 못했다면 귀농이라도 했을 거다. 실패한 PD가 마지막 몸부림을 친 거지…. 이미 뜻은 이뤘다. 실패한 PD가 상까지 받았으니 성공한 거고, 감지덕지라고 생각한다."
15일 개봉, 전체 관람가.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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