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생활 때의 기억이다. 당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추운 겨울 잠을 반토막 내고 나서야 하는 새벽 경계근무였다. 고스란히 온몸으로 버텨야 했던 전방의 매서운 추위는 콧날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지금도 그 추위는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여행 취재 때 가장 추웠던 건 해 뜨기 직전 겨울 호수에서 새벽 안개를 뒤집어썼을 때가 아닌가 한다. 엄동설한을 제대로 실감하게 된다. 간혹 카메라 배터리가 맹추위에 금세 방전되는 바람에 결정적인 컷을 놓쳐 땅을 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곤혹스러웠어도 겨울이 깊어지면 또 생각나고, 발걸음이 저절로 향하는 곳은 그 겨울 호수다. 아무도 없는 빈 호수는 나 혼자만을 위해 서리꽃과 뿌연 안개가 어우러진 선경을 빚어낸다. 날카로운 키스와 같은 그 황홀한 유혹에 겨울 호수의 물안개를 또 그리워하게 된다.
새벽 물안개를 맞으러 간 곳은 강원 화천의 파로호다. 겨울 물안개가 최고로 아름답게 피어나는 곳이다. 파로호는 일제가 수력 발전을 위해 건설, 1944년 완공된 인공호수로 북한강 최상류의 가장 시원하고 깨끗한 물을 담은 청정 호수다.
이처럼 어여쁜 이름의 호수도 없을 것이다. 입 속에 굴러가는 파로호의 어감은 그 담은 물처럼 부드럽고 상쾌하며 시원하다. 하지만 이 이름은 한국전쟁에서 유래한다. 국군이 중공군 3만여명을 이곳에 수장시킨 전승을 기념해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적을 사로잡아 대파했다'는 뜻으로 내린 이름이라고 한다.
희뿌연 여명을 받으며 도착한 파로호. 수면에서 치밀고 올라온 차가운 안개가 고개 위까지 넘실거렸다. 수면으로 내려가니 풍경은 더욱 고왔다. 안개가 수초의 마른 가지에 엉겨 붙어 찬란한 서리꽃을 피워냈다.
어둠이 가라앉고 주위가 환해지면서 서리꽃은 더욱 크게 부풀어 올랐다. 꾸역꾸역 골짜기에서 뿜어져 나온 물안개는 건너편 산자락 전체에 서리꽃으로 마치 함박눈이 내린 듯한 설경을 그려 놓았다.
겨울 호수의 물안개는 봄 가을의 그것과 달리 느껴진다. 짙은 장막의 형태가 아니라 가늘게 분분이 피어올라 부드럽게 살랑인다. 호숫물에서 솟아 오른 한 올 한 올의 가는 실타래 같은 것이 솜처럼 풀어지며 수면 전체로 번져나간다.
물안개는 모든 상심을 덮어줄 것만 같은 포근한 모습이지만 막상 몸으로 맞을 때 그 냉기가 만만치 않다. 호수는 이따금 물 위로 날아오르는 물오리떼들 말고는 움직임이 없어 적막하다. 물가에 바짝 다가가 안개가 뺨을 스치는 소리에 집중해본다.
내게도 저 마른 수초처럼 고운 눈꽃이 내려앉으려나. 시린 가슴을 보듬은 저 겨울 물안개가 이 몸에도 아름다운 서리꽃을 피워줄 것인가. 가만히 서서 눈을 감는다.
간동면 구만리와 용호리 등 파로호 주변을 옮겨 다니며 찻길에서 내려다 보는 안개 자욱한 호수 풍경도 장관이다. 호수 가운데 둥실 떠 있는 바지선은 안개의 흐름에 모습을 감추었다 드러냈다를 반복한다.
안개를 가득 품었던 건너편 골짜기는 산등성이 너머로 태양이 떠올라 강렬한 빛을 비추자 급격하게 안개를 토해 내기 시작한다. 물안개는 마치 총소리에 놀란 새떼처럼 요란스럽게 솟구쳐 하늘로 날아올랐다.
■ 여행수첩
● 화천은 춥다. 바로 붙어 있는 춘천보다 수은주는 항상 몇 도 더 아래를 가리킨다. 축제장인 화천천은 골바람의 영향으로 바로 옆의 화천 읍내보다 또 몇 도 낮다. 이 화천천보다 더 추운 곳이 새벽 물안개를 피워내는 파로호다.
● 파로호를 가려면 화천읍에서 461번 지방도를 타고 동쪽으로 가다 구만교나 대붕교를 건너 구만리로 향한다. 구만리 고개를 넘어 용호리 방면으로 가다 보면 말골 낚시터 등 여러 낚시터를 지난다. 이들 낚시터가 새벽 물안개를 감상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파로호 선착장에선 보다 넓은 호수를 조망할 수 있다.
● 화천 읍내 바로 앞의 붕어섬이나 하남면 원천리 등도 수초에 가득 서리꽃을 피워내는 새벽 물안개를 감상하기 좋은 곳이다.
● 구만교에서 460번 지방도를 타고 북쪽으로 오르면 근대 역사의 상흔을 간직한 꺼먹다리를 지난다. 일제가 기초를 놓고 소련군이 교각을 세우고 휴전 후 남한에서 상판을 놓아 완성한 다리다.
● 꺼먹다리를 지나 북으로 좀더 오르면 여름철 가족 유원지로 유명한 딴산이 나온다. 겨울엔 딴산 인근 봉우리에 인공 폭포가 만들어진다. 얼어붙은 냇가에서 썰매를 지칠 수 있다.
화쳔=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볼거리·즐길거리 더 많아졌네 '산천어 축제' 10일 팡파르
강원 화천의 겨울은 흥겨움으로 북적거린다. 올해로 7번째 치르는 '얼음나라 화천 산천어 축제' 때문이다. 시작 몇 년 만에 겨울 최고의 축제로 자리를 잡은 인기 축제다. 얼음낚시의 짜릿한 손맛을 아는 강태공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이번 축제는 10일 시작해 27일까지 18일간 진행된다.
축제 장소는 화천읍을 끼고 돌아 춘천호로 흘러드는 화천천이다. 폭이 한 30m 될까. 그리 넓지 않은 이 하천은 천연 얼음벌이다. 겨울이면 군부대가 물길을 막고 스케이트장을 만들어 '전투 스케이트'를 탔고 주민들도 얼어붙은 하천 위에서 썰매를 지치던 추억의 놀이터다.
화천천의 얼음에 구멍을 뚫고 산천어를 건져 올리는 얼음낚시가 축제의 하이라이트. 축제가 성공을 거듭하면서 늘어난 손님만큼 축제장도 계속 넓어졌다.
올해는 상류쪽에 3,000명 규모의 예약 전용 가족 낚시터를 신설했다. 당일 현장에서 접수해 참가할 수 있는 하류쪽 낚시터도 9,000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는 크기로 늘어났다.
얼곰이성 앞의 썰매광장도 확대됐고 출렁다리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는 타워형 봅슬레이도 선형을 개량해 더욱 안전해졌다. 이색 체험인 산천어 맨손잡기장도 12m 지름으로 커졌고, 참가자들이 편안히 옷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탈의실과 대기실용 대형 에어돔도 설치했다.
화천천 외에 화천 읍내에 2곳의 축제장이 운영된다. 화려한 얼음 조각을 선보이는 하얼빈 빙등광장이 단위농협 뒤편에 문을 열고, 실제 크기의 숭례문 눈 조각 등을 볼 수 있는 세계겨울도시광장이 물레방아공원에 조성됐다.
얼음낚시와 맨손잡기 등의 체험료는 주말과 휴일에는 1만2,000원(초등생 경로자 장애인 등은 주말 평일 구분 없이 5,000원)이고 평일에는 1만원이다. 체험료를 내면 5,000원권의 농촌사랑나눔권을 돌려 받는다. 이 상품권으로 지역의 농산물을 구입해 갈 수 있다.
얼음썰매를 빌릴 경우 가족형 썰매는 예치금으로 1만원을 내면 썰매 반납 시 화천사랑상품권 1만원으로 돌려받고, 일반 얼음썰매는 5,000원을 예치했다가 화천사랑상품권 5,000원권으로 돌려받는다. 화천사랑상품권은 화천 읍내 대부분의 가게에서 사용할 수 있다. 나라축제홈페이지 http://ice.narafestival.com 1688-3005
화천=이성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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