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달 4,5일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중ㆍ미 전략경제대화. 빚쟁이(미국)를 맞은 채권국(중국)은 당당했다. 전세 역전은 확연했다. 중국 측은 "미국은 국내경기와 금융상황을 안정시켜 중국이 보유한 미국 채권 등 미국 내 중국의 재산을 보호해야 한다"(왕치산ㆍ王岐山 부총리)며 미국을 압박했다. 저우샤오촨(周小川) 중국 인민은행장은 "미국 금융위기의 원인은 지나친 소비, 담보보다 과도한 채권을 발행하는 과도한 레버리지 때문이다. 미국은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하며 저축률을 높이고 재정ㆍ무역 적자를 줄여야 한다"고 미국측에 훈수까지 뒀다.
#2. 지난해 11월15일 미국 워싱턴에 주요 20개국(G20)의 정상이 모였다. 미 월가발(發) 글로벌 금융위기를 진화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 였다.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과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주최한 만찬에서도 두 지도자가 다른 정상들을 제치고 부시 대통령의 바로 양 옆에 자리했다. 룰라 대통령은 "G20없이는 어떠한 정치ㆍ경제적 결정이 이뤄질 수 없다. 신흥경제국은 반드시 글로벌 금융위기 해결에 참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신흥 경제 대국들이 도전장을 내고 있다. 금융위기의 소용돌이에서 전세계가 만신창이가 된 이 때, 미국 영국 등이 주도해온 글로벌 경제질서의 판도를 바꿀 기회를 잡겠다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의 약화는 분명 '브릭스'(BRICsㆍ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로 대표되는 신흥국들에게는 호기가 되고 있다.
일단 중국 등의 도전이 시작됐다. 빌 클린턴 행정부에 몸담았던 로저 알트만 전 재무차관보는 <포린 어페어스> 최신호에서 "미국에 쏠려있던 무게중심이 분산되고 있다"며 "신흥경제파워, 특히 중국은 미국과 유럽이 경기 회복을 위해 분투하는 과정에서 위상을 강화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포린>
■ 중국 등 신흥대국에 의한 체제 재편
11월 G20정상회의는 회의 개최 자체만으로도 세계에 흥분을 낳았다. 우선 중국 브라질 인도 등 신흥국들이 글로벌 금융위기의 구원투수로 공식 등판했다는 사실 자체에 더 의미가 컸다.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캐나다 이탈리아 등 G7이 스스로 현재의 글로벌 금융위기를 해결하기에는 체력이 달린다고 실토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G8(G7+러시아)을 대신해 신흥국들이 대거 포함된 G20회의가 열린 것은 "세계 경제질서가 다시 쓰여지고 있다"(뉴욕타임스)는 증거였다.
신흥국들은 금융위기를 불러온 선진국들을 향해 거세게 성토했다. 그 결과 선진국들로부터 국제금융기금(IMF)과 금융안정화포럼(FSF) 등에서 지분을 양보하겠다는 합의를 얻었다.
신흥국들도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비켜가지는 못한다. 하지만 미국 일본 유럽 선진국들의 경제는 올해 뒷걸음질칠 것이 뻔한 반면, IMF에 따르면 중국(8.5%) 인도(6.3%) 러시아(3.5%) 브라질(3.0%)은 성장률이 둔화하기는 해도 어쨌든 플러스 성장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신흥국들이 상대적으로 선진국을 따라잡을 기회를 맞은 셈이다.
표민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중국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난해 6%였으나 내년에는 7%가 넘어갈 것"이라며 "금융위기로 선진국이 주춤거리는 동안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의 비중이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특히 중국이 이번 금융위기의 링에서 확실한 승자가 될 것이라는 데 이견을 달지 않는다. 중국은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두자릿 수 성장을 거듭한 끝에 세계 4위 규모의 경제대국, 최대 외환보유국으로 컸다.
중국은 드디어 경제 체력에 걸맞은 위상 찾기에 나섰다. 이제는 미국에도 할 말은 하겠다는 태도다. "미국의 경제 구조조정이 부진하면 중국 정부는 미국 국채 매입을 중단할 수 있다"는 으름장마저 놓고 있다.
미국 국채 최대 보유국인 중국이 더 이상 미 국채를 사지 않거나 팔아치울 수도 있다는 얘기인데, 세계 제1의 기축통화 달러를 얼마든지 뒤흔들 수 있다는 섬뜩한 경고인 셈이다. 미 달러화의 기축통화 체제에도 도전했다. 중국은 지난해 말 홍콩, 마카오,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러시아와 무역결제를 달러에서 위안화로 바꾸기로 했다.
■ 팍스 시니카는 오지 않는다?
물론 신흥국들도 갈림길에 섰다. 모두가 미국 일본 등의 톱 경제대국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신흥 경제대국'이 될 수는 없는 일. 중국 인도 브라질 러시아 등은 중장기적으로 세계 경제 판도를 변화할 수 있는 펀더멘털을 지닌 것으로 꼽힌다. 반면 이미 아이슬란드와 헝가리 우크라이나 등 동유럽 신흥국들은 허약 체질을 드러내며 위기에 무너졌다.
이중 중국은 2030년께 미국을 제치고 세계1위 경제대국으로 올라설 것이라는 전망이 대세다. 그러나 중국이 유일무이한 세계 패권을 잡는 '팍스 시니카'의 시대로 옮겨갈 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
표 연구원은 "중국이 세계 패권을 쥐기 위해서 넘어야할 산은 미국만이 아니다. 유럽을 포함해 현재 세계 경제를 이끌어가는 자본주의 즉 서구문명을 넘어서야 '팍스 시니카'가 올 것"이라며 가능성을 낮게 봤다.
박현수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세계 경제질서 재편 논의가 본격화하면서 중국 브라질 러시아 등이 과소평가됐던 펀더멘털을 인정 받으며 발언권도 강화되고 역내에선 패권 국가적 성격도 띠게 될 것"이라며 "다만 기존 질서에 편입해 목소리를 높여나가는 것이지 서구 중심의 패권 구도를 180도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 "G20·G13 지분 늘려야" 경제비중 83%… G7체제 재검토 목소리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세계가 주목한 큰 교훈은 G7(선진7개국)을 넘어서는 새로운 지도체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세계 경제질서를 주도해온 건 G7이었다.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캐나다 이탈리아 등 G7이 세계 경제의 채 절반도 대표하지 못하는 한계 앞에서 세계 경제질서의 지도체제 개편이 불가피해졌다.
이런 배경에서 G20(G7+브릭스 등 신흥경제국)과 G13(G7+브릭스ㆍ남아공ㆍ멕시코)이 G7의 후발주자로 유력하게 검토되기 시작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G20을,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등 유럽측은 G13으로 확대 개편을 선호했다. 그러나 G20이나 G13이 G7 중심 체제를 완전히 대체할 것으로도 보이지는 않는다.
G20과 G13의 공통분모는 쉽게 찾을 수 있다. 브릭스(BRICsㆍ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라는 신흥국 대표주자들이다.
세계 경제에서 브릭스 국가의 비중이 1999년 7.4%에서 지난해 14.4%(추정)으로 커지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세계 경제ㆍ금융질서 논의에서 이들 국가의 지분이 확대될 필요가 있다는 논리다. 그 중에서도 핵심은 중국이다.
특히 세계 최대의 외환보유국, 미국 국채 보유국인 중국이 빠져있다는 점은 G7의 치명적 결함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았다. 로저 알트만 전 미국 재무차관보는 중국을 G8에 편입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2007년 국내총생산(GDP)을 기준으로 하면, G7국가는 전체 세계 경제의 43.5%만 커버하는 반면, G13은 68%를, G20의 세계경제 비중은 83%까지 확대된다.
● IMF 쿼터·의결권 배분도 논란
국제 금융ㆍ통화거버넌스의 핵심기구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개혁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할지 관심이 크다.
IMF는 여전히 미국 주도의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흥국들의 불만이 많았다. IMF의 지분(쿼터)과 의결권 배분에서 신흥국들이 경제 펀더멘털에 비해 과소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4월 IMF는 2년여의 개혁 작업 끝에 중국 한국 인도 브라질 등 신흥개발국 중심으로 50개국의 쿼터를 상향 조정했다.
중국이 당초 2.98%에서 4%로 늘어나면서 이탈리아와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치고 쿼터 상위 6위 국가로 올라섰고, 한국은 0.76%에서 1.41%로 증액되면서 28위에서 19위로 급상승했다.
반면 영국 프랑스 캐나다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등의 쿼터가 줄었다. 그래도 국내총생산(GDP)으로 따진 중국과 한국의 경제규모는 각각 4위, 14위로, IMF내 국가 위상과는 여전히 차이가 있다.
지난해 G20정상회의에서 IMF 등 국제금융기구 내에서 신흥국과 개발도상국의 경제력을 반영해 대표성을 확대해야 한다는 원칙에 합의한 만큼, 이제 신흥국의 지분 확대 논의는 본격화할 전망이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신흥국의 쿼터와 의결권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선진국들의 기득권 축소가 전제되야 한다"며 "IMF의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논의가 시작돼도 신흥국의 위상 강화는 더디게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문향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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