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기축(己丑)년, 소띠해다. 12간지(干支) 동물 중에 가장 느리고 더딘 게 바로 소다. 그 발걸음은 우직하고 듬직하다. 육중한 몸매가 둔한 듯하지만 뚜벅뚜벅 먼 길을 지치지 않고 간다.
성실하고 참을성 많고 독창적이고 사색적이고 논리적이라고 알려진 소띠의 특성은 의외로 프로기사란 직업에 좋은 항목이 많다. 그래서 그런지 국내 프로기사 중에는 유난히 소띠가 많다.
현역 프로기사 가운데 최연장자인 최창원 6단(1937년생)을 비롯, 양상국 9단과 이상철 김덕규 8단(1949년생) 안관욱 7단, 박성수 4단(1961년생) 김승준 이상훈 9단(1973년생)이 모두 소띠다.
여기에 '송아지 삼총사'로 유명한 최철한 박영훈 원성진 등 1985년생은 이재웅 김진우 조혜연 백지희 김대용 이다혜 김환수 김동희 진시연 등 무려 12명이나 돼 단일 연도별로는 단연 1위다.
소띠해를 맞아 한 평생을 우직하게 바둑 보급에 헌신해 온 소띠 기사 양상국 9단을 만났다.
- 1949년생 소띠니까 올해 환갑이다. 새해를 맞는 소감이 남다를 것 같다.
"입단대회에 6번 출전해서 실패하고 7번째 도전에서 겨우 성공해 하늘을 날 듯 기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어느덧 국내기사 서열 8위가 됐다. 그동안 보급기사의 길을 걷느라 화려한 기사생활은 못했지만 '입신의 품'(9단)까지 올랐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일생일로(一生一路), 바둑이나 인생이나 꾸준히 한 길을 가야 한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가는 한 마리 토끼도 얻지 못하는 법이다. 소가 실족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소는 험한 땅에 도장을 찍듯 뚜벅뚜벅 우직하게 걸어가지만 결코 발을 헛디뎌 넘어지지 않는다. 내가 옳다고 믿는 길을 시종여일(始終如一) 쉼 없이 가는 사람만이 뜻을 이룰 수 있다."
- 바둑 보급을 일찍부터 시작했다. 당시에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이라 어려움도 많았을텐데.
"프로기사가 돈만 바라본다면 피곤하다. 성직자처럼 살아야 속이 편하다. 기사생활 40년동안 단 한 번도 남에게 어렵다는 얘기를 한 적이 없다. 희생정신 없이는 보급에 나설 수 없다. 프로라는 권위의식을 버려야 한다. 아마추어의 바둑을 직접 기록하고 복기해 주는 일을 지금까지 변함없이 해오고 있다.
프로의 세계에서 승부에 몰두하는 건 길어야 10년이다. 중년에 접어들기 전까지 치열하게 승부에 몰입하되 한편으로는 다양한 분야의 팬들과 깊이 있게 소통할 수 있는 기본적인 소양을 갖춰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승부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감이 익어 떨어질 때만 바라고 있어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 흔히 바둑은 인생과 같다고 말한다. 바둑의 본질은 무엇인가?
"바둑은 균형이다. 초반에서부터 중반, 종반에 이르기까지 두 사람이 균형을 이루며 공동으로 엮어내는 작품이다. 바람이 천지사방에서 불어와도 흔들리지않는 마음(八風吹不動)을 유지하면 바둑의 질은 자연히 향상된다. 삶의 길도 마찬가지다. 항상 자신의 분수를 지키고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아야 한다. 욕심과 요행을 바라면 발전은 없다."
- 특히 아마추어 바둑팬들과 오랫동안 끈끈한 관계를 맺어온 것으로 유명한데.
"바둑은 상대와의 소통이요, 배려다. 바둑팬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항상 하심(下心 : 자신을 최대한 낮춰 남을 배려한다는 불교 용어)의 자세로 대하면 저절로 인연이 깊어지고 오래 간다. 성균관대 사회교육원에서 4년간 강의하다가 요즘은 잠실 연구실로 자리를 옮겨 모임을 갖는데 지난 7년간 한 주일도 빠지지 않고 나오는 분이 있을 정도다."
- 요즘 젊은이들이 바둑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고 해서 걱정이 많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회적인 추세를 거스를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보급 일선에서 얻은 경험으로 볼 때 바둑은 아무래도 청년층보다 중ㆍ노년층에 적합한 '놀이'다.
더욱이 한국은 급격히 고령화사회로 접어들고 있으므로 바둑보급의 초점도 실버계층에 맞추는 게 옳다고 본다. 실제로 요즘 우리 연구실 강의에 열심히 나오는 분들은 모두 50대 이상이고 70세가 넘은 분들도 많다."
- 한마디로 요즘 바둑계가 위기인가.
"그 동안 바둑계가 배부른 적이 있었던가. 특히 우리 같은 보급 기사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사실 바둑 인구가 조금 줄어들었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바둑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예전보다 크게 낮아졌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바둑의 '격(格)'이 떨어진 게 문제다. "
- 최근 프로바둑계의 현안인 프로기전의 상금제 도입에 대한 생각은.
"주요 기전에 스폰서가 떨어져 나가는 등 姆構?주변 환경이 자꾸 악화되니까 나온 자구책으로 이해는 되지만 너무 서둘러서는 안 된다. 단순히 예선 대국료 몇 푼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 수십년간 바둑계 발전에 나름대로 기여한 선배기사들이 긍지와 보람을 느끼면서 물러날 수 있는 다각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작년말에 열렸던 시니어기전은 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동안에는 대국통지서가 날아와도 별 감흥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모처럼만에 같이 늙어가는 사람들끼리 시합을 하니까 느낌이 조금 달랐다. "
불교와 한학에 조예가 깊은 양9단은 주돈이(周敦?)의 애련설(愛蓮說)에 나오는 '향기는 멀어질수록 더욱 맑다(香遠益淸)'는 구절을 새해 덕담으로 내놓았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어나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은 흐름에 씻기면서도 요사를 부리지 않고, 속은 텅 비었지만 바깥은 곧다. 넝쿨져 의지하지 않고 가지를 치지 않는다. 향기는 멀어질수록 더욱 맑고 청정하다.'는 뜻이다.
◆ 양상국 9단은
1949년 서울생으로 1970년 서봉수와 함께 입단, 프로의 길로 들어섰다. 1980년대까지 각 기전 본선에서 꾸준한 활약을 펼치다 1989년 한겨레신문 바둑칼럼 집필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바둑보급에 나서기 시작했다.
특히 1990년에 시작한 EBS바둑강좌는 이미 900회를 넘어 내년 4월 1,000회 돌파를 앞두고 있다. 바둑계 최초로 성균관대학교 사회교육원에서 바둑강의를 담당했으며 요즘도 매주 화요일이면 서울 송파구 신천동 잠실종합상가에 위치한 연구실에서 30년째 변함없는 환한 웃음으로 바둑팬들을 맞고 있다.
'양상국 바둑특강' '바둑의 길, 삶의 길' '절묘한 맥 1-5' 등의 저서가 있으며 현재 한국기원 감사를 맡고 있다.
박영철 객원 기자 indra036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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