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라연
동짓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 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
…가끔… 전기가… 나가도… 좋았다… 우리는…
새벽녘 우리 낮은 창문가엔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 별 두서넛이 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았을 우리의 사랑방에서 꽃씨 봉지랑 청색 도포랑 한 땀 한 땀 땀 흘려 깁고 있지만 우리 사랑 알아서 앞마당 대추나무에 뜨겁게 열리지만 장안의 앉은뱅이저울은 꿈쩍도 않는다 오직 혼수며 가문이며 비단 금침만 뒤우뚱거릴 뿐 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서울의 산 일번지에 떠도는 옛날이야기 그대 사랑할 온달이 없으므로 더더욱
꽃씨 봉투 같은 신방이 환하다. 가끔 정전이 되기도 하는 산 일번지이지만, 어둠 속에서도 사랑은 늘 자가발전하는 빛이다. 가난한 꽃씨 부부는 맵찬 바람과 비에 젖어 우는 사연들을 속에 쟁이면서 꽃을 피울 기대로 마냥 행복하다. 가장 성스러운 만남을 혼수와 가문을 잣대로 저울질하는 불구의 장안 풍속도를 생각할 때, 아직도 이런 사랑이 있다는 게 은총처럼 느껴진다.
그러니 단순한 옛날이야기요 신파적 사랑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라. 너무 영민해져버린 온달 또한 탓하지 마라. 작은 꽃씨 속 따뜻한 아랫목의 불씨는 얼어붙은 서울 하늘 아래 아직 이렇게 살아 이어지고 있으므로. 촉 낮은 꽃씨 속의 희미한 불빛이 더 잘 보이도록 내 방의 전등 촉수를 낮추어본다.
손택수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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