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좋아하는 것의 의미와 그걸 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며 새해를 열었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좋아한다는 것만으로도 그건 그 사람의 특징이 된다. 내가 아는 선배는 언제부턴가 선배의 어머니가 마련해 놓은 옷감을 가지고 옷을 만들기 시작 했다. 물론 처음엔 그 선배가 키우던 강아지들의 옷이었다. 애완견에게 너무 많은 돈이 들어가자 강아지들의 살림살이를 직접 제작해 재미 삼아 브랜드도 만들어 붙이고 하며 바느질에 솜씨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것 같다. 기왕에 재미 붙인 거 주변 사람들에게 한두 가지씩 가방이며 모자며 수첩커버 등등을 만들어 선물 하곤 했는데, 받는 사람들로선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디자인에 그녀가 손수 나를 위해 만들어 줬단 것 때문에 감동이 두 배 이상이었다.
어느 날인가 그 선배가 만들어준 가방을 들고 함께 삼청동을 산책하고 있는데, 어떤 옷 가게 주인이 가방이 너무 예쁘고 특이하다며 어디서 샀느냐고 물은 일이 있었다. 공연히 으쓱해지며 아는 사람이 만들어 주었노라고 얘기 했더니, 몇 개 만들어 자신의 가게에 갖다 놓으면 어떠냐고 적극적으로 물어 보는 것이었다.
내 옆의 선배는 공연히 얼굴이 빨개져 나를 잡아 끌며 그만 나가자고 했다. 차를 마시며 그 선배에게 적극적으로 생각해 보라고 얘기 했더니, 자신은 그냥 좋아서, 재미있어서 만든 것 뿐 이라고 자꾸 손사래를 쳤다. 무언가 자신도 생산을 하고 있다는 자족감이 크다는 것이었다. 그 후로도 그녀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만들고 급기야는 겨울 코트를 만들어 입고 나온 적도 있었다.
그러자 주변의 사람들이 슬슬 그녀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는 말하지 못하고, 마치 그녀가 어딘가에 유폐되어 살고 있다는 투로 나에게 그녀의 안부를 묻는 것이었다. 뭐가 아쉬워 집에서 그러고 있느냐, 그 학력에 능력 있는 그녀가 왜 그렇게 살고 있느냐 등등…
나는 그 선배가 똑 부러지게 일 잘하던 시절도 알고 있고, 유쾌하게 사람들과 잘 어울릴 때도, 여행을 같이 한 적도 있다. 언제부턴가 이 사회 시스템이라는 것에서 한발 물러나 자신만의 시스템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 하는데, 우리는 남과 같다는 것은 싫어하면서 또 남처럼 되지 못해 안달하며 사는 데 완전히 길들여져 있다.
전 지구적인 경제난 때문에 '르네상스 맨'을 부르짖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과학 철학 문학 미술 등 전 분야에 뛰어난 능력을 갖추어야 21세기를 살아 갈 수 있다나 뭐라나...우리 모두가 다빈치처럼 되어야 하는가? 그래야 지구 최후의 날에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이 될 가능성이라도 있다는 것인가? 아무리 어려운 시기라고 해도 사람을 옥죄며, 더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고,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채찍질 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 선배가 만들어낸 무엇인가가 사회적 통념에서 볼 때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더라도 조금 더 풍부하고 복잡한 인생을 보내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해가 간다. 그렇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다. 취미 삼아 종이를 자를 수도 있고 편지도 쓸 것이다. 이건 나의 결론이 아니라, 프랑스 영화 감독 미셸 공드리가 그의 영화 <도쿄> 를 만들며 한 얘기다. 그의 이야기에 완전 공감이다. 도쿄>
이미연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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