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반니 아리기 지음ㆍ백승욱 옮김/그린비 발행ㆍ656쪽ㆍ3만5,000원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촉발된 미국발 세계 금융ㆍ경제위기는 지난 한 세기 세계를 지배한 미국의 헤게모니와 자본주의 역사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매뉴앨 월러스틴과 함께 '세계체계' 분석의 대표적 학자로 손꼽히는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교수 조반니 아리기가 쓴 <장기 20세기> 는 자본주의의 세계 헤게모니 교체의 역사를 분석함으로써 이런 궁금증을 풀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한다. 장기>
아리기는 지금 자본주의가 참으로 결정적인 전환점에 놓여있지만,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오랜 기간에 걸친 위기와 구조조정, 개편과 같은 불연속적인 변동은 자본주의 발전의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그는 자본의 체계적 축적 순환이 국가간 체계와 결합해 근대자본주의의 역사를 만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어느 시기에 강력한 국가를 배경으로 한 자본이 세계시장에서 우위를 점하는 축적체계를 수립하면, 국가ㆍ정치ㆍ이데올로기적 우위를 바탕으로 국제사회에 자국 중심의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오랜 기간 고이윤 부문을 독점하는 헤게모니 국가가 출현하게 된다. 자본주의 역사는 이런 헤게모니의 등장과 쇠퇴, 그리고 새로운 헤게모니로의 교체의 역사라는 것이다.
'화폐, 권력, 그리고 우리 시대의 기원'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에서 아리기는 서구 자본주의에서 이런 체계적 축적 순환이 4번에 걸쳐 발생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첫번째는 15세기에서 17세기 초의 제노바 순환, 두번째는 16세기 말에서 18세기 대부분의 시기에 걸친 네덜란드 순환, 세번째는 18세기 후반에서 20세기에 걸친 영국 순환, 네번째는 19세기 말에 시작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미국 순환이다.
그는 이 순환들이 모두 1세기 이상 지속됐기 때문에 '장기 세기'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아리기는 페르낭 브로델의 장기 순환 개념과 콘트라티에프의 순환 개념을 받아들이면서도 마르크스의 자본 이론을 기초로 앞선 여러 학자들의 학문적 성과를 모아 자본주의 역사를 재구성했다.
아리기는 이 책에서 제노바ㆍ네덜란드ㆍ영국 체계의 등장과 쇠퇴를 미국 체계와 비교, 분석함으로써 20세기말 이후의 금융 팽창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해석하고 있다. 각각의 체계에서 먼저 노동과 기계 같은 실물 부문의 투자가 증가하는 실물적 팽창이 일어나고 뒤이어 금융 부분이 주요 산업으로 등장하는 금융적 팽창이 뒤따르게 되는데, 금융적 팽창은 다음 번 세계적 규모의 축적체계로 이행하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금융적 팽창은 생산과 교역에 대한 투자가 자본가층에게 순수한 금융거래만큼 효과적으로 현금흐름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어난다. 15세기 제노바에서는 자본주의 과두제가 상업에서 은행업으로 전환했고, 18세기 중엽 네덜란드도 상업에서 철수해 '유럽의 은행가'가 됐으며, 영국도 산업혁명의 모험이 끝난 뒤 화폐자본이 과잉 공급되자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이 같은 경향을 따랐다.
아리기는 미국 체계의 실물적 팽창이 1950, 60년대에 절정기에 달했으며 금융적 팽창은 1970년대에 본격화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미국의 세계 헤게모니의 위기는 이미 1970년대에 시작되었다고 진단한다. 1970년대 초에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되면서 고정환율제가 변동환율제로 바뀌었고, 자본 이동에 대한 규제가 철폐됐으며, 공공채무의 증권화가 진행되는 등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시작됐다.
앞선 세계 헤게모니의 쇠퇴 국면과 마찬가지로 미국도 실문 부문에서 자본의 수익률이 하락하자 자본의 핵심사업이 점차 금융으로 전환되었고, 이것이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전파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렇다면 장기 20세기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아리기는 향후 세계자본주의의 전개 방향에 대해 3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있다. 첫번째는 미국을 중심으로 대서양 연안의 국가들이 공동지배하는 방식의 세계제국 형성, 두번째는 동아시아가 세계경제의 중심지로 등장해 동양과 서양의 국가들이 균형 관계를 형성하는 길, 세번째는 헤게모니 국가 없이 혼란이 지속되는 길이다. 그리고 아리기는 다음번의 세계 헤게모니를 장악할 잠재력을 가진 지역으로 동아시아를 주목하고 있다.
남경욱 기자 kwna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