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수
점심으로 라면을 먹다
모처럼 만에 입은
흰 와이셔츠
가슴팍에
김칫국물이 묻었다
난처하게 그걸 잠시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평소에 소원하던 사람이
꾸벅, 인사를 하고 간다.
김칫국물을 보느라
숙인 고개를
인사로 알았던 모양
살다 보면 김칫국물이 다
가슴을 들여다보게 하는구나
오만하게 곧추선 머리를
푹 숙이게 하는구나
사람이 좀 허술해 보이면 어떠냐
가끔은 민망한 김칫국물 한두 방울쯤
가슴에 슬쩍 묻혀나 볼 일이다
무슨 논쟁 끝에 벗과 절교를 선언한 날의 일을 그대로 풀어 쓴 것이다. 가끔씩 이렇게 전혀 시적이지 않을 것 같은 일상이 낯설게 다가올 때가 있다. 작품화하면서 바뀐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실은 그때 입고 있던 옷은 '흰 와이셔츠'가 아니라 검정색 티셔츠였다. 검정색 티셔츠에 묻어 잘 드러나지 않는 김칫국물을 보다가 흰 와이셔츠로 바꾸는 순간 시가 줄줄 흘러나왔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한 소식 한 것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이 시는 사실 타자와의 소통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은근히 배면에 깔고 있다. 그래서 '묻혀도'나 '묻혀'라고 하지 않고 다소 자조적인 조사를 붙여 '묻혀나'라고 한 것이다. 시를 쓴 후 벗에게 화해의 전화를 걸었는지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오만한 머릿속의 먹물을 앞세워 뻣뻣해질 때마다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게 했던 김칫국물을 생각해본다. 김칫국물 가라사대, 머리와 가슴은 좀 친근해질 필요가 있다.
손택수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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