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시골의 야산 기슭 양지 바른 곳을 걷다 보면 넘실대는 연보랏빛과 마주치게 된다. 싸리나무 꽃이다. 높이 2~3m, 굵기 2~3㎝ 크기까지 자라는 싸리나무는 속이 단단하면서도 탄력이 있고 잘 썩지 않는다. 그래서 소쿠리, 광주리, 삼태기나 개구쟁이 아이들의 눈물을 쏙 빼는 회초리를 만드는 데 사용됐다. 줄기에 기름기가 많아 말리지 않아도 불에 잘 타고 화력도 좋아서 땔감용으로 그만이었다. 흉년이 들면 어린 싹을 나물로 해 먹거나 씨를 갈아서 죽을 만들어 먹었다니, 그야말로 민초의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긴 '서민 식물'이다.
▦겨울이 다가오면 싸리나무를 잘라 싸리비를 만드는 어르신들의 손놀림이 바빴다. 나무를 말린 뒤 잎을 털어내고 적당한 크기로 모아 끈으로 묶으면 완성이다. 시골 집 마당에 어지러이 널린 낙엽을 쓸 때, 겨울 새벽 소복이 쌓인 함박눈을 쓸 때 싸리비는 '싸~악, 싸~악'소리를 냈다. 상상만으로도 정감이 느껴지는, 한국의 대표 소리다. '봄에는 싸리비 꽃잎을 쓸고/ 여름엔 싸리비 빗물을 쓸고/ 가을엔 싸리비 낙엽을 쓸고/ 겨울엔 싸리비 흰 눈을 쓸고.'(윤석중 <싸리비> ) 그렇게 제 몸 하나 닳아 없애며 한 철을 보낸 싸리비는 아궁이에서 한 줌 재가 됐다. 싸리비>
▦플라스틱 빗자루에 밀려 사라졌던 싸리비가 요즘 부활하고 있다. 강원 평창군 대하리, 충북 진천군 구암마을, 충남 태안군 대기1리의 노인회는 벌써 수년째 싸리비를 만들어 공공기관과 복지시설 등에 무료로 나눠주고 있다. 10여년 전부터 매년 싸리비 2,000~3,000개를 만들어 무료로 나눠준 경북 봉화군 새마을회는 지난해 12월 30일 청와대에 싸리비 300개를 선물했다. 청와대 측이 제설효과가 뛰어난 싸리비를 사용하려고 수소문하다 봉화군 새마을회의 인심을 접하고 부탁했다고 한다. 덕분에 그곳 어르신들은 청와대 구경도 하고 식사 대접도 받았다.
▦싸리비로 흙마당을 쓸면 가지런한 결이 남는다. 손과 팔에 힘을 가할수록 그 결은 깊고 선명하게 패인다. 비질도 오래 할 수 없다. 천천히, 부드럽게 해야 낙엽도, 흰 눈도 잘 쓸리는 법이다. 추운 겨울, 청와대에 싸리비를 만들어 준 어르신들의 마음이 그와 같았을 것이다. 어지러운 것을 쓸어내고,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히 경제를 살려 도시로 나간 자식과 손주들 삶이 나아지게 하고, 위기에 직면한 농촌에 희망의 불씨를 살려주기를 간절히 바라지 않았을까. 그런 싸리비로 국민의 고통과 불안을 쓸어내야 할 청와대의 어깨가 어느 때보다 무거워 보인다.
황상진 논설위원 apr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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