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오후 여야 3당 원내대표 회담을 주재하는 김형오 국회의장의 목소리엔 피곤함이 가득했다. 그는 그런 목소리로 이렇게 토로했다. "병자호란 당시 주화파와 주전파의 싸움에 휘말린 느낌이다."
며칠 새 그는 여야 양쪽으로부터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다. 야당은 질서유지권 발동을 걸어 그를 검찰에 고발했고, "임시국회 내에 직권상정은 없다"고 하자 여당 일부 의원들은 그를'배신자'라고 두들겼다. 새까만 후배 초선 의원은 그를 향해 "의장 잘못 뽑았다"고도 했다.
새해 벽두 최악의 여야 충돌 속에서 김 의장은 고집스레 여야 대화를 촉구하고 균형을 유지했고 그게 대화 재개의 실마리를 풀어냈지만, 그 '공'(功)은 비난의 폭포 속에 묻혀버렸다.
'끝까지 대화를 추구한 의회주의자'란 칭찬 대신 '기회주의자' '스타일리스트'란 비아냥만 쏟아진다. 국회의장 이후 다시 돌아가야 할 친정 한나라당, 그리고 청와대…이들과의 균열을 감수하면서까지 의회주의를 택한 것인데 누구 하나 어깨를 두드려주지 않는다.
의장실의 한 관계자는 "지금 어쩔 수 있나. 시간이 지나면 진정성을 이해해 줄 것"이라고 했다. 김 의장 역시 이날 원내대표 회담을 주재하면서 "어떤 오해를 받더라도 국회가 대화하는 모습, 변화된 모습을 국민에 보여주도록 하겠다"며 원칙 고수를 분명히 했다.
직권상정과 관련한 김 의장의 원칙은 이렇게 정리된다.
"여당이 임시국회에서 처리하겠다는 85개 법안 가운데 대다수가 아직 해당 상임위에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 국민 대다수는 이른바 쟁점법안의 내용조차 잘 모른다. 그런데 의장이 무더기로 직권상정, 처리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여야 대치가 시작될 무렵부터 김 의장은 쭉 이런 생각이었다고 한다.
김 의장은 그래서 요즘 측근들과 얘기할 때면 '농축'이란 말을 자주 쓴다고 한다. "합의된 것은 빨리 처리해 넘기되, 합의 안된 것은 여야가 계속 대화하고 국민적 토론을 거쳐 농축의 단계를 밟아야 한다"는 것이다.
측근들은 그래서 김 의장이 ▦1월에 합의 가능한 법안을 우선 처리하고 ▦2월 국회에서 여야가 쟁점법안을 놓고 머리를 맞대는 과정을 밟는 로드맵을 갖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여야가 끝내 쟁점법안 처리에 합의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 한 측근은 "김 의장이 '직권상정 안 한다'는 얘기를 끝까지 하지 않은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농축 과정을 거쳐 때가 됐는데도 쟁점법안이 처리되지 않는다면 그때는 '직권상정'이란 최후 권한을 쓰겠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동훈 기자 dh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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