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지음ㆍ임홍빈 옮김/ 문학사상 발행ㆍ277쪽ㆍ1만2,000원
"만약 내가 소설가가 되었을 때 작정하고 장거리를 달리기 시작하지 않았다면, 내가 쓰고 있는 작품은 전에 내가 쓴 작품과는 적지않게 다른 작품이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거기까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무엇인가가 크게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은 확실히 든다"(127쪽)
의사에게는 진료가, 변호사에게는 변론이 그러하듯 소설가에게 글쓰기란 본질적으로 고통스런 노동이다. 이런 반복적인 노동이 주는 육체적ㆍ정신적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작가들은 '숨 쉴 구석'을 만들어두곤 하는데, 소설가 김훈에게 자전거, 성석제에게 바둑이 그런 구석이라면 무라카미 하루키(60)에게 그것은 달리기다. 하루키가 달리기를 시작한 것은 대학을 졸업한 뒤 운영하던 재즈카페의 문을 닫고 전업작가로 나선 1982년께. 처음에는 건강을 위해서 시작했지만 그는 지금 스물대여섯 차례나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했고, 종종 트라이애슬론 대회까지 참가하는 어엿한 베테랑 러너가 됐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는 '달리기' 라는 행위를 매개로 하루키가 소설가로서 보내온 30년의 세월을 정리한 회고적 에세이다. 그는 "소설을 착실하게 쓰기 위해 신체능력을 가다듬어 향상"시키기 위해서라고 자신이 달리는 목적을 소개했으나, 그에게는 '글쓰기>달리기'라고 본말(本末)을 구별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두 행위는 포개져 있다. 그 상사(相似)적 관계를 스스로 포착하느 하루키의 시선은 집요하다. 달리기를>
가령 그는 글로써 얻는 명성이나 수입은 소설가의 본령과 상관없는 것이라며 "자신이 쓴 작품이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 도달했는가 못했는가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며 그런 의미에서 소설을 쓰는 것은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것과 비슷하다"(26쪽)고 비유한다. 소설가로서 어떻게 스스로를 연단해 왔는가에 대한 비결을 설명할 때도 그는 달리기에 빗댄다. 소설가로서의 중요한 자질인 집중력과 지속력을 몸에 배게 하는 과정에 대해 그는 "매일 조깅을 계속함으로써 근육을 강화하고 러너로서의 체형을 만들어가는 것과 같은 종류의 작업"(122쪽) 이라고 표현한다.
굳이 "어떤 면도(面刀)의 방법에도 철학이 있다"라는 서머셋 몸의 말을 들춰내지 않더라도, 마치 매일 면도를 하듯 따분하고 사소해 보이지만 30년 가까이 매일 지속한 달리기라는 행위를 통해 그는 음미해볼 만한 인생에 대한 통찰에 도달한다. 뜨거운 여름날 마라톤 코스를 뛰며 머릿속에 아른거리던 차가운 맥주 한 잔을 결승선을 통과한 뒤 마시고는 생각만큼 맛있지 않음을 깨닫는 순간, 섬광처럼 머리를 스친 생각에 대해 그는 이렇게 쓴다. "제 정신을 잃은 인간이 품는 환상만큼 아름다운 것은 현실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90여편이 넘는 소설, 에세이를 발표했지만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았던 하루키가 스스로의 일상과 소설가로서의 자의식을 비교적 솔직하게 털어놓은 점도 이 책을 읽히게 만드는 요소다. 그가 남다른 감각의 촉수를 뻗어 만들어낸,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보면 때때로 나 자신이 해변에 밀려온 한낱 나무토막에 지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등대 쪽에서 불어오는 무역풍이 유칼리나무를 머리 위에서 산들산들 부드럽게 흔들어댄다" 같은 '하루키 표 문장'은 그를 사랑하는 독자들의 신뢰를 배반하지 않는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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