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처에서 어음을 받을 때 마다,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 시한폭탄을 받는 기분이라니까요. 무슨 전쟁터도 아니고….”
인천 서부산업단지에서 주물을 생산하는 중소 S업체 L사장은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넘기고 있다. 납품해온 대기업이 최근 물품대금을 현금에서 어음으로 바꿨는데, 결제 기일마저 차일피일 늦어지고 있다. L사장의 머리 속엔 IMF 당시, 받아뒀던 어음이 부도처리되는 바람에 회사를 날려 버릴 뻔 했던 악몽이 떠오른다.
중소기업 현장에서 돈은 지금 씨가 말랐다. 도는 것은 오로지 어음 뿐. 그나마 3개월 이상이 대부분이다. 어음을 할인하기 위해 은행에 가지만, 이조차 보증기관 보증서가 있어야 하는 터라 어음 그 자체가 또 다른 자금부담 요인이다.
은행대출이 꽉 막힌 상태에서, 중소기업이 운영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은 납품대금 뿐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현금 아닌 어음, 그것도 만기가 긴 어음으로 돌고 있으니… 그렇다고 거래 대기업에 항의라도 했다가는 납품관계 자체가 끊어질 수도 있어. 울며 겨자먹기로 현실을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사채시장을 노크하는 기업들도 차츰 늘어나고 있다. 경기 수원 금속조립업체 S사의 자금담당자는 “은행에서는 거래업체의 여신상황이 좋지 않아서 어음할인이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어 결국 사채시장을 찾아 다닐 수 밖에 없다”며 “급전이 필요해 사채시장까지 가게 됐지만 어음할인율이 너무 높아 결국 손해를 감수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중앙회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중소 제조업체들은 판매 대금의 45%를 어음으로 받고 있다. 불과 1년전 만해도 어음비중은 30%대였다. 현금결제바람을 타고 점차 자취를 감췄던 어음의 망령을 경제위기가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
어음결제기일이라도 짧으면 어떻게 버텨보겠지만, 상황은 정반대다. 굴지 대기업 H사는 그 동안 15일이던 어음결제기간을 45일로 늘렸다.
이 회사와 거래하는 중소기업 A사의 K사장은 “한달 이상 결제기일이 늦어져 급한 마음에 할인을 받으려고 은행에 갔는데 이제는 보증기관의 보증을 요구한다”며 “내로라 하는 대기업의 어음까지 보증서를 요구하는 현실에서 중소기업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소기업 도산이 급증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작년 8월만해도 178개였던 부도업체수는 9월 203개, 10월 321개로 늘어났으며 11월에도 297개의 중소기업이 자금난을 견디지 못한 채 쓰러지고 말았다.
허재경 기자 rick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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