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이영성 부국장 겸 정치부장
_여야의 합의안을 보면 처리시기가 명시되지 않은 쟁점법안들이 많습니다. 한나라당의 판정패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민주당의 폭력에 막혀 우리 뜻대로 잘 안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진 것이라기보다 의회 민주주의가 폭력에 짓밟힌 결과라고 봐야 합니다."
_본회의장 점거나 몸싸움 같은 물리력을 막을 제도적 방법을 생각하십니까.
"그런 원시적 폭력을 쓸 때는 법과 제도가 무력해집니다. 아무리 법과 제도를 잘 만들어도 그것을 짓밟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국민의 강한 비판과 감시가 중요합니다. 국민이 한나라당도, 민주당도 잘못했다는 식의 양비론을 택하면 누구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폭력이 되풀이 될 수밖에 없어요. 어느 한 쪽이 잘못했다고 국민이 결단을 내려주어야 합니다. 판사가 판결을 내릴 때 피해자에게도 잘못이 조금 있다고 피고인을 무죄라고 판결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쌍방과실이라는 개념을 없애야 법이 엄격하게 집행될 것입니다."
_한나라당도 2004년 4대 입법 정국 때 국회 점거 농성을 했고 1999년엔 국회 내 안기부 비밀 사무실 문을 뜯고 들어간 적이 있지 않습니까. 여야 간 물리력 사용이 돌고 도는 적폐는 아닌지요.
"그 때도 한나라당이 잘못했으면 비판했어야 합니다. 한나라당도 나쁘고 안기부도 나쁘다는 식은 안 된다는 겁니다. 자꾸 양비론을 전개하니까 그런 폐습이 오늘까지 내려온 것입니다. 다만 안기부 사무실 사건과 이번 사태가 다른 점은 당시 우리는 이틀간 사무실 문 앞을 지키면서 문을 열어 달라, 대화하자고 수 차례 이야기하며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할 수 없이 문을 딴 것입니다."
_한나라당이 상임위 논의절차 등을 제대로 밟지 않고 직권상정을 추진해 법안 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야당은 비판합니다.
"우리가 먼저 그런 잘못을 했다해도 민주당이 본회의장을 폭력으로 점거하고 의원 출입을 폭력으로 막은 큰 잘못이 용서되진 않습니다. 미디어 관련법을 비롯해 법안들을 상임위에 상정해 토론하자고 수십 번 제안했어요. 하지만 민주당은 상임위를 점거해 상정 자체를 막았습니다. 그래서 최후의 수단으로 국회의장의 직권 상정을 요구한 것입니다."
_여야 합의문을 보면 몇몇 쟁점법안들에 대해 '합의 처리'한다고 돼있습니다. 야당이 끝까지 반대하면 처리를 포기한다는 의미입니까.
"애매하게 표현된 문구가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법안 처리는 법과 원칙에 따라 해야 하는데, 국회법엔 합의 처리를 해야 한다는 조문은 없습니다. 여야가 협의하다가 잘 안 되면 다수결로 하는 것이 국회법의 대 원칙입니다. 이번에 민주당과 타협을 하려다 보니 국회법엔 반하는 문구가 많이 들어갔습니다. 그만큼 고심한 결과지요. 합의 처리하겠다는 것은 정치도의적으로는 지켜야 하는 것이고, 협의 처리는 잘 안 되면 국회법을 따르면 됩니다."
_일부 법안에 대해 '합의 처리하도록 노력한다'고 했는데, 의미가 무엇입니까.
"문구 그대로 이해해야지, 노력하다가 잘 안되면…. 행간을 읽어야 합니다."
_노력해도 안 되면 국회법대로 다수결로 하겠다는 것입니까.
"노력한다는 내용까지만 보고 받았어요."
_당내 친이계를 중심으로 원내지도부 책임론도 나오고 있습니다.
"6일 밤 의원총회에서 의원들이 다 이해하고 박수를 쳤습니다. 아직 국회가 끝나지 않았고 2월까지는 어려운 길이 남아 있는데 지금 선장이 내리면 되겠습니까. 의원들이 큰 마음으로 합심해서 어려움을 넘겨야 합니다."
_김형오 국회의장은 '의원들도 잘 모르는 법안을 어떻게 직권상정 하느냐'고 했습니다.
"의원들이 모든 법안을 숙지하고 투표한 적은 없습니다. 의원들이 모든 법안을 숙지할 때 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현실적으로 법안 처리를 하지 못합니다. 각 상임위에서 당론을 바탕으로 소관 법안을 충분히 논의하고 심사하면 믿고 따라가는 겁니다. 그도 안 될 경우엔 당 정책위에서 법안을 만들어 의원총회에서 설명하면 신뢰를 보내주면 되는 것입니다."
_김형오 의장의 자세는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김 의장은 학교(경남고ㆍ서울대) 후배이고 국회에서도 20년을 함께 한 사이라 평가할 입장이 아닙니다."
_법안 처리 문제로 김 의장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만났습니다. 그 때 나눈 대화는 회고록에 쓸 수 있게 남겨두겠습니다. (웃음)"
_13대 국회 때 당시 여당인 민정당 김윤환 원내총무는 대화와 타협으로 여소야대 정국을 이끌었는데 그런 정치는 안 되는지요.
"지금 원내 지도부가 허주(虛舟ㆍ김 원내총무 호)의 스타일을 닮지 못해서 타협의 정치를 못하는 게 아닙니다. 야당의 靡섟?달라졌어요. 당시 의석분포 상 민정당은 야3당 중 어느 한 당의 협조를 얻어야 과반이 될 수 있었고, 야3당도 모두 합해야 과반이 됐습니다. 그래서 여야 모두 세게 나갈 수가 없었고, 타협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금같은 단일 야당 시대와는 다르지요. 3당 합당으로 그런 타협의 정치문화가 종지부를 찍게 돼 안타깝습니다. "
_청와대와 내각 개편설이 나오는데, 바람직한 개편 방향은.
"내각이 경제를 살리고 국민에 희망을 주기 위해 무슨 역할을 할 것인지가 중요하지, 인적 개편을 어떻게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 현실돌파 의지가 있는 내각, 경제위기라는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노력과 희생이 있는 내각이어야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_당내 기류는 지금 내각으론 부족하다는 것 아닙니까.
"그 문제를 공식적으로 논의한 적은 없습니다."
_정치인 입각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부처 성격에 따라 다를 텐데 좋은 점도 상당히 많습니다. 하지만 DJP(김대중+김종필) 내각 때는 엉터리 인사들이 많이 입각했습니다. 그런 전철을 밟아선 안 됩니다."
_박근혜 전 대표가 '한나라당이 내놓은 법안들이 국민에게 실망과 고통을 준다'는 발언을 했는데요.
"법안 자체가 아니라 법안 처리과정이 실망과 고통을 준다는 표현으로 들었습니다. 당내 계파 갈등이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로 들리고, 계파 갈등을 바라는 사람에겐 다르게 들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웃음)"
_당내 화합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한나라당이 172석을 가지고도 응집하지 못한 것 아닙니까.
"의원들 사이에 친소 관계는 있지만 계파는 없습니다. 보스가 있고 특정 사안이나 정책에 대해 한 목소리를 내고 행동 통일을 해야 계파지, 친하게 지내는 모임이나 연구 모임을 계파로 볼 수 없어요. 계파 의식이 많이 약해졌다고 봅니다."
_이재오 전 의원이 조만간 귀국한다고 합니다.
"귀국 여부에 대해 직접 들은 바 없습니다. 귀국을 하느냐 마느냐, 언제 어떻게 하느냐, 언제 정치를 재개하느냐는 이 전 의원이 결정하는 겁니다. 당에서 가타부타할 문제가 아니지요. "
_원외 대표라 당 장악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그런 이야기 있는 것 알고 있지만 지금 어떤 액션을 할 때는 아닙니다. 원내 문제에 당 대표를 비롯한 최고위원들이 크게 관여할 수 없는 것은 당 대표와 원내대표의 투톱 시스템을 규정한 제도 때문입니다. 당 대표가 너무 장악하려고 하면 당헌 정신에 반하는 것입니다. 쟁점 법안과 관련해서는 최고위원회의를 하루 한두 번씩 소집해 홍 원내대표의 얘기를 듣고 조언도 많이 했습니다."
_4월 재보선 등을 통해 국회에 다시 들어갈 뜻이 있으신지요.
"당장 길이 열려 있는 것도 아니고, 길이 열려야 생각을 하지…. 모르겠습니다."
_야당에 한 말씀 하신다면.
"달라지자, 변하자는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만날 구태나 보이고 폭력의 관행에 젖어 있으면 정치권이 공멸합니다. 이제부터는 참신한 정치를 합시다. 국회에도 변화와 개혁의 바람이 불었다고 국민이 느낄 수 있도록 국회법에 따라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합시다."
■ '폭력' 10번넘게 언급 화난 '화합의 남자'
'화합'은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의 트레이드 마크다. 과격한 표현 대신 촌철살인의 유머나 사자성어로 콕 찌르는 것을 좋아하는 부드러운 남자다.
그런 박 대표가 7일 여의도 당사 대표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선 "민주당이 휘두른 폭력의 장벽에 부딪혔다", "의회 민주주의가 폭력에 짓밟혔다"는 격한 표현으로 민주당을 비난했다. 그는 한 시간여의 인터뷰 동안 '폭력'이라는 말을 10번 넘게 썼다.
박 대표가 속도전을 외치며 드라이브를 걸었지만 '172석의 힘'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민주당의 실력 저지에 좌초한 데 대한 개탄의 표현인 듯 했다. 그는 "만날 구태나 폭력에 젖어 있으면 정치권은 공멸한다"는 경고로 인터뷰를 마쳤다.
정리=최문선기자 moonsun@hk.co.kr
사진=고영권기자 youngk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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