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모든 유희 가운데 그것은 영혼을 전복해 버릴 위험이 있는 유일한 것이며, 또한 그 유희를 하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육체의 광기에 자신을 방기하게 되는 유일한 것이다. 술을 마시는 사람이 이성을 포기하는 것은 필요불가결한 일이 아니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이 이성을 계속 간직한다면 자기의 신에 끝까지 복종한다고 할 수 없다."(26쪽)
로마 5현제(賢帝)의 한 사람인 하드리아누스 황제(76~138)가 불치병에 걸린 후 세손으로 책봉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자신의 인생을 회고한다는 내용을 다룬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1903~1987)의 소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민음사 발행)이 번역됐다. 하드리아누스>
유르스나르가 "키케로에서 아우렐리우스에 이르는 시기는, 이교의 신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그리스도는 아직 나타나지 않아, 인간 홀로 존재했던 유일한 시대였다"라는 플로베르의 한 편지에서 영감을 받아 집필한 이 소설은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인 2세기, 법학 문학 미술을 부흥시켰으며 넘치는 인간적 매력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빼어난 휴머니스트'로 불리는 하드리아누스의 진면목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재현한다.
삶과 죽음에 대한 단상, 인간사의 본질과 이상향, 황제가 지켜야 할 덕목, 제국의 흥망성쇠에 관한 비밀까지, 때로는 최고의 권력자로서 때로는 한 인간으로서의 하드리아누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소설도 소설이지만 본문 뒤에 첨부된 엄청난 분량의 '작가노트'와 '자료개괄'은 작가가 이 소설에 들인 공력을 실감하게 한다.
하드리아누스에 대한 작품을 쓰겠다고 결심한 작가의 스무살 무렵의 결심부터 30여년에 걸친 광범하고 치밀한 자료조사, 작품에 드러나는 빼어난 심리묘사의 뼈대가 되는 단상들까지, 대작(大作)의 이면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읽을거리가 풍성하다.
벨기에에서 태어났으나 생후 열흘 만에 어머니를 잃고 프랑스에서 성장한 유르스나르는 20대 중반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 1951년 발표한 이 작품으로 문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유르스나르는 그녀의 필명으로 본명의 성(姓) 크레앵쿠르(Crayencour)의 철자를 뒤집어 작명한 것이다.
그는 외국인 자격으로 벨기에 왕립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됐으며, 프랑스 정부의 레지옹 도뇌르 훈장, 하버드대 명예박사학위 등을 받았고, 1981년에는 그 이전까지 340여년 동안 단 한 명의 여성 회원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첫 여성 회원이 된 작가다.
이왕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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