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오전 11시 관악산 자락. 중요무형문화재 27호 이애주 승무 전수소. 발표회를 앞둔 이수생들이 춤사위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애주(62)씨가 7년 전 어린이집을 통째 고쳐 만든(이씨는 '리모델링'이란 말은 쓰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집 마당에 드는 양광을 조명 삼아, 엷은 미소까지 지으며 추어 보이는 춤사위가 한국인들의 눈에 익다. 폭압적 정권이 젊은이들의 피를 탐하던 지난 시절, '시국춤' 또는 '바람맞이춤'이라고 불렸던 그의 몸짓이다.
이제 그는 그 춤에 "위지동이전에 기록된 바 수족상응의 형태"라며 본명을 찾아주었다. 바로 승무의 기본 동작이다. 가사, 장삼 등을 두르니 흔히들 승무(僧舞)라 하지만 그는 대승적인 탈 것의 춤, 즉 승무(乘舞)라는 말이 옳다고 한다.
강산이 변하긴 변했다. 1996년 문화재로 지정된 그를 찾아갔을 때 서울대 체육학과 교수 연구실에서 내놓던 녹차가 이번에는 푹 고은 유기농 모과차로 바뀐 것은 기자의 감각이 느끼는 변화다.
근본적 변화는 좌향좌에서 우향우로 돌아앉은 세상을 응시하며, 그가 보다 심화ㆍ확대된 변화의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대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 헤어 스타일이 펑크족으로 변했다.
"방학 때면 짧게 잘라, 머리를 좀 쉬게 한다."
- 이 집은 어떻게 꾸려 나가나.
"문화재 전수금 100만원에다 서울대 체육교육과 교수로 있으면서 받는 월급을 '찔러' 넣는다. 전에 있던 동네에서는 북소리 때문에 투서가 들어와 쫓겨나기도 했지만, 이렇게 와 보니 자연 속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다."
- 현재 문하생들은 몇 명인가.
"이수자(전수자 혹은 전수조교의 전 단계)가 12명이다. 전수조교는 자질, 실력, 교육기능 등을 보고 결정한다. 예전에는 스승이 했지만 이제는 국가 소관이 돼 버렸다."
- 제2의 IMF라며 힘들어하는 이번 연말 연시는 어떤가.
"지난해 11월 9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중국, 일본의 대표적 전통 무용가들과 했던 '동북아 몸짓의 같음과 다름'이 전부다. 나는 승무를 독춤으로 췄다. 공연계의 타격이 유독 크다. 빈곤한 무대를 겪고 나니 춤이란 단순한 동작이 아니라, 사회ㆍ경제와 맞물리는 예술 양식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 우리 춤의 기본 동작은.
"삶의 몸짓이다. '위지동이전' 중 답지저앙(踏地低仰ㆍ땅을 밟고 하늘을 우러르다)에 수족상응(手足相應ㆍ서로 조화되게 손과 발을 놀린다)한다는 말로 명료하게 표현돼 있다. 농경사회에서의 일 동작이 곧 춤인 것이다. 몸에서 체득돼 생각과 정신으로 이어지는 연결선의 정점이다. 사실 1970년대 고구려의 춤무덤(舞踊塚ㆍ무용총) 그림을 영인본으로 보고 내 승무 동작과 흡사해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이후 미술사학자들과 고구려연구회 활동도 하고, 중국에 가서 실제로 보기도 했다."
- 우리 춤의 근본에 대해 학문적으로 탐색을 한 계기가 있었을 텐데.
"2007~2008년 한국정신과학학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생명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할 기회를 가졌다. 김재수 KIST 책임연구원이 수석 부회장, 강명자 꽃마을한방병원 원장과 소광섭 서울대 천문학부 교수 등이 부회장, 우희종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 등이 임원으로 있었다. 통합ㆍ융합을 화두로 해 변해가는 이 시대에 기, 생체, 전통, 잠재력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자는 것이었다."
- 얼른 와 닿지 않는 행보다.
"춤꾼이 조선 초기 학자 김일부의 '정역(正易)'을 운운하며 정신문화원 등지에서 강의하고 다니니 주목해 왔던가 보다. 그래서 10년 전 창립 4년차 되던 그 모임에서 초청 특강을 갖게 됐다.
우리 전통 놀이의 특성인 영가무도(詠歌舞蹈)를 풀어 '깊게 소리 내 읊다, 빨라지면 일어나니, 거기서 춤이 나온다'고 강의했다. 그것이 21세기 전지구적 문제, 즉 환경 파괴, 지구 온난화, 테러와의 전쟁, 첨단 질병 등의 문제 풀이로 연결된다는 내용이었다.
두어 달 후 다시 초청이 왔을 정도로 호응이 컸다. 이사회에서 나를 회장으로 추대한 계기였다 한다. 과학자들이 독차지해 오던 자리를 춤꾼에게 맡겼으니 대단한 의식의 전환인 셈이다. 춤 춘 지 55년째 되던 지난해, 그 같은 경험이 합해져 춤과 몸에 대한 생각이 선명하게 정리됐다."
- 그래서 회장 일까지 맡게 된 것인가.
"이제 학문은 융합적ㆍ통합적 관점으로 나아가야 한다, 여성이라 더욱이 시대의 추이와 맞다는 판단이었던 모양이다. 사실 쟁쟁한 학자들 앞에서 특강을 하면서 나 자신도 많이 정리됐다.
특히 문화재로 지정되고 나서, 춤을 근원적 미의식으로까지 파고들어야 한다는 결심이 서게 됐다. 이후 내가 몸으로 통섭과 융합을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 춤을 하다보니, 우리 말과 글을 제대로 써야 춤이 바로 된다는 사실까지 깨닫게 됐다. 그 같은 인식은 역사적 현장에서 춤을 추며 자연스레 생겨났다."
- 특히 기억 나는 순간들을 꼽는다면.
"일제 강점기의 '무용'이란 말밖에 없던 상황에서 '춤'이란 말을 처음 공식화한 1974년의 '제1회 이애주 춤판'이 먼저다. 당시로서는 쌍소리였던 춤과 판을 묶어 놨더니 무용계로부터 욕이 쏟아졌다. 1987년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집회에서 했던 '바람맞이' 굿은 사회적으로 관심을 끌게 된 계기였다.
사실 그 해 6월 소극장 연우무대에서 내 춤판 무대의 한 마당으로 선보이려 했는데, 후배 김민기(극단 학전 대표)ㆍ김석만(서울시립극단장) 등이 내 춤판을 꾸미면서 '누님 이름으로 해야 선전이 된다'고 우기는 바람에 그 이름을 못 냈다. 이후 이한열, 박종철, 권인숙 등 민주화운동의 희생자가 생길 때마다 가서, 수십 차례 '바람맞이'를 췄다."
- 요즘 시국을 어떻게 보나.
"소통이 막힌 상태다. 자기를 한없이 낮춰 비움으로 향해야 한다. 내면적 성찰이 너무 없다. 경제대국이 됐지만 우리의 본질은 왜곡되고 망가졌지 않은가. 무대에 나가 하는 것만이 춤이 아니다. 공연은 춤의 일부일 뿐이다. 내 삶이 곧 춤이다."
- 당신의 춤사위를 공개적 무대에서 볼 날은 언제인가.
"춤은 무대 위의 동작만이 아니다. 말, 소리, 글로도 춘다. 바로 '정역'을 화두로 하는 '영가무도'의 세계다. 나는 지금 내 춤의 중대 변환점에 와 있다. 그 자료는 내 몸이다. 몸에서 체득되지 않으면 결코 정리될 수 없다. 그것은 곧 민중의 삶과 통합되는 것을 의미한다."
- 민중이란 말은 이제 폐기되지 않았나.
"사실 그것도 서구 용어(people)를 번역해 쓴 70년대 말인데, 나는 요즘도 가끔 쓴다."
- 당신 춤의 결론은.
"2006년 정신과학문화원에서 춤 인생 55년을 정리하며 강의했던 '한춤'(또는 '한밝춤'), 즉 한국의 몸짓이다. '한'이란 높고, 크고, 깊고, 거대함을 뜻한다. 동시에 하얗고 밝고 눈부시면서 검을 현(顯)을 뜻하기도 한다. 한춤은 우리 모두 함께 하는, 광대 무변한 공동체의 춤으로 한국을 상징하는 한국 춤이다."
● 인간문화재 지정 이후
이애주씨는 인간문화재 지정 이전이나 이후나, 사회와의 접촉 면적에는 변함이 없다. 문제는 이미지다. 운동권의 대모 같았던 지난 시절의 잔상이 현재의 그를 가리고 있다고나 할까.
경기 과천시 갈현동 이애주 승무 전수소는 문화재로서의 그의 공식적 전승 공간이다. 그의 제자들은 1970년대 초부터 함께 공부해 오고 있는 일심동체의 사람들이다. 바로 그의 일부다.
2007년 6ㆍ10 민주화 항쟁 20주년 현장에서 시민들과 함께 췄던 걷기춤 등은 시민과의 소통을 위한 자리로, 한밝춤의 연장이었다. 동시에 우리 춤을 세계의 보편 언어로 승화시킨 사례였다. "세계적 화두인 춤을 답지저앙의 지신밟기로 변화시킨 거죠." 그는 걷기를 춤으로 정제, 호응을 이끌어낸 이 경험을 중시한다.
그것은 고구려 벽화 속 사신도의 춤사위를 21세기 삶의 동작으로 자연스럽게 연결짓는 작업이기도 했다. 종종 열리는 걷기 행사 때 대규모로 펼치는 등 앞으로 다양한 쓰임새를 엿본다.
그는 "터를 벌리고 있다"며 자기 춤의 현재를 규정했다. 독도, 한라, 백두 등 한반도 사방의 최전방에서 통일을 기원하며 추는 춤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다. "2000년 되자 밀레니엄이라며 난리 칠 때, 우리 터전의 총체적 확대를 상징하는 행사는 없었죠. 신문, TV, 방송사 등지를 통해 가늠하고 있어요."
IMF 사태 당시보다 힘들다는 말이 도처에 자욱하다. 그는 추위에 언 기운을 훈기로 풀어내는, 이 시대의 살풀이가 필요하다고 했다. "액과 한을 버릴 건 버리고 본래 상태로 되돌리는 거예요."
그가 긍정하는 자본주의상이다. 공산ㆍ사회주의의 좋은 점을 융합한 자본주의가 돼야 한다. 그는 곧 사회주의적 이상을 확산한 '우주적 사회주의'라는 말로 자신의 현재의 이념적 위상을 밝혔다.
미국서 촉발된 경제위기와 관련, "원래 가진 자들이 중심ㆍ기둥ㆍ줏대를 바로 세워야 한다"며 "정치ㆍ경제를 끌고 가는 분들은 잘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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