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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52> 제작자 박경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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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52> 제작자 박경애씨…

입력
2009.01.08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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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 천국이 있다.” 기축년 새해 아침, 끝이 보이지 않는 불황의 터널에 들어서 어깨를 움츠리고 있을 영화 동지와 내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시네마 천국> . 이태리 영화 감독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1988년 작품이다. 2차 대전 직후, 이태리 시칠리아 섬의 한 작은 마을에 '시네마 천국'이라는 낡은 영화관이 있었다. 소년 ‘토토’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장 성당으로 달려가 신부님의 일을 돕는다. 토토가 열심히 신부를 돕는 이유는 바로 영화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토토는 영사기술을 배우고 싶어하지만 영사기사 ‘알프레도’는 토토가 그러지 말기를 바란다. 휴일도 없는 영사기사 생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알프레도는 화재로 두 눈을 잃게 되자 토토에게 영사기술을 전수해 준다. 그리고 실연에 빠져 방황하는 그에게 "이 마을엔 너를 위해 마련된 게 아무것도 없다.”며 떠나게 한다. 세계적 영화감독이 되어 알프레도 장례식에 온 토토는 자신의 꿈이 그와 더불어 실현된 것을 알게 된다.

‘시네마 천국’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영화’를 우리가 보게 되고 이 ‘단어’가 ‘보통명사화’ 된 것은 한 여성 영화사업가의 앞서가는 판단 덕분이었다. 1988년 5월, 칸느 영화제. 한국 영화수입업자들 뿐만 아니라 제작자, 감독들도 칸느 영화제는 관심 밖이었다. 그러나 한 영화제작자가 세계영화제의 현장을 누비고 있었다.

하루를 25시간으로 나누어 세계영화제를 누비던 그녀 눈에 걸려든 영화가 바로 였다. 칸느의 어느 이른 아침, 뤼미에르 4000석 대극장에는 새벽잠을 설치고 달려온 세계 각국의 영화기자들만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영화제는 동트기 전까지 심야영화와 파티로 북적거린다. 당연히 오전 8시30분 기자 시사회가 인기가 있을 리 없다. 무명의 이태리감독 영화이니 더욱 그러했다.

그 자리에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이태리어는 물론 프랑스어에도 익숙하지 않았다. 게다가 <시네마 천국> 의 러닝타임은 보통 영화보다 1시간이 더 긴 2시간 55분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겐 영화가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름다운 음악이 인도하는 ‘시네마 천국’ 속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갔다.

그녀는 곧 영화를 구매하였다. 영화제에 참가한 세계 언론들이 ‘CINEMA PARADISO’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사건이 일어났다. <시네마 천국> 이 ‘그랑프리’를 수상한 것이다. 이어 이듬해 초 ‘골든 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연이어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까지 수상했다.

그녀는 세계영화제 수상과 세계영화시장의 흥행기록을 내세워 전국의 극장 문을 수없이 두드렸다. 그러나 ‘퇴짜’, ‘퇴짜’였다. 무명배우, 무명감독... 올드한 싸구려 이태리영화를 누가 보느냐는 것이었다. 영화 제목을 <시네마 천국> 으로 한 것에 대해 ‘천국’이 종교영화 같다며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다. 포스터에 노인이 나온다고 던져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굽히지 않았다. ‘제목을 바꾸지 않는다.’ ‘포스터도 바꾸지 않는다.’ 뛰고 또 뛰었다. 해가 바뀌었다. 그녀는 결단을 내렸다. 극장을 빌리기로 하였다. 연극전용관인 잠실 롯데예술극장을 대관하였다. 기존극장들과 정면대결에 나선 것이다. 극장가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신문과 TV에 광고가 나가고 영화평이 언론에 소개되자 퇴짜를 놓았던 호암 아트홀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어떤 조건이라도 좋으니 같이 개봉하자는 것이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무명의 이태리영화’에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리기 시작했다. 호암아트홀과 롯데예술극장이 연일 매진이 되자 전국 극장주들이 대경실색을 했다.

필름을 달라고 영화사로 달려와 아우성을 쳤다. 순식간에 전국 관객이 300만명(전산화기록 경우 700만 이상)이 넘어섰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영화에 빠져 들어갔다. 영화 주제곡이 전파를 타고 전국을 덮었다. ‘시네마천국 바람’은 한국의 새로운 사회적 현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존의 안일함과 획일성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외국영화수입 패턴도 바뀌기 시작했다. 고가의 폭력, 저질 할리우드영화를 수입하려고 치열하게 경쟁하던 외화수입업자들이 유럽의 고급영화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신발 끈을 다시 조여 매었다. 자의든 타의든 그녀는 사회 변화의 선봉에 서 있었다. 영화를 처음으로 만든 프랑스 형제 ‘뤼미에르’를 따서 ‘국내 최초의 예술영화 전용관’을 설립하였다.

<그린파파야향기> , <패왕별희> , <길버트 그레이프> , <베어> , <샤인> , <비밀과 거짓말> , <네 번의 결혼식과 한 장례식> , <유로파> 등 작품성과 예술성 높은 아시아 및 유럽, 호주영화를 수입 배급하며 한국 영화인들과 영화관객의 눈높이와 질을 향상시키고 다양화하는데 앞장섰다. 영화의 질과 완성도에 의해 부가가치가 창출된다는 단순하고도 명쾌한 영화논리를 확인시키는 장을 열어 간 것이다.

삼성, 대우, 현대, SK, LG 등 한국의 굴지의 기업들이 영상사업단을 차리고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모두가 허탕이었다. 그들은 수천억 원을 세계시장에 날리고 보따리를 쌌다. 철학이 달랐다. 그녀의 영화에 대한 철학은 분명했다. “영화는 돈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두뇌로 만드는 것이다. 영화가 좋으면 돈도 되고 예술도 된다.” 그러기에 많은 천재들이 꿈을 갖고 영화의 길을 달린다고 그녀는 말하곤 했다.

작금의 영화계가 위기에 봉착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세계가 마찬가지다. 그 요인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다문화, 다매체로 변화해 가는 사회 상황이 한 요인이다. 당연히 개개인의 요구도 다르고 또 변화해 간다. 결국 지금 필요한 것은 그 요구와 변화를 선도해 가는 능력일 것이다. 영화인 모두 신발 끈을 다시 조여 매고 더 높은 시각에서 앞을 보아야 한다. 인류에게 행복과 기쁨의 ‘판타지’를 선사할 준비를 하여야 한다.

영화의 충격은 꽁꽁 얼어붙은 지구를 한방에 녹여버릴 수 있다. 새해 아침, 400여 대학 영화과 학생들이 교문을 나서며 꿈의 영화계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이들에게 인류사회에 기쁨과 행복을 실은 ‘판타지’를 선물할 영화를 만들 기회를 제공하고 후원해 주어야 한다. “시네마천국...” 벌써 20년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시네마천국의 판타지’는 지금도 우리 눈앞에, 귓가에 아른 거린다.

혹자는 말한다. “한편의 영화가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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