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이 잦은 탓에 회사에 자주 얼굴을 비추지 못한다. 간만에 뵌, 복도에서 마주친 고참 선배가 안부를 물었다. "추운데 고생이 많지. 요즘엔 어디로 다니나. 나라가 좁고 볼 게 많지 않으니 매주 뭘 소개할지 고민이 많겠네."
"아니에요. 우리나라 절대 좁지 않아요. 아직 못 가본 곳도 많고 알려지지 않은 비경이 얼마나 많은데요."
여행에 별 관심 없는 선배의 말에 그냥 "네, 네" 하며 대충 얼버무리지 않고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던 건 이번 출장에서 찾아낸 정선의 비경 같은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강원 정선의 지세는 첩첩산중이란 표현만으론 부족하다. 땅이 높고 깊어 하늘은 아주 작은 원을 그리고, 해의 동선이 짧아 볕이 내려 쪼이는 시간도 길지 않다. 오죽하면 앞산과 뒷산의 봉우리에 빨랫줄을 걸 수 있는 곳이라 했겠는가.
날카롭게 솟은 산들 사이로 흐르는 물도 그 굽이가 산세 못지않게 역동적이다. 곧장 가로지르면 50m도 안될 거리를 산허리를 탐하면서 몇 굽이를 돌고 돌아 흐른다.
그 물줄기들이 모여 조양강이 되고 다시 동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큰 물이 되며 한강으로 도도히 흘러간다. 조양강을 이루는 주요 물줄기로 발왕산에서 내려온 송천, 검룡소에서 시작된 골지천, 오대산 우통수가 기원인 오대천이 있고, 그리고 또 하나 국내 가장 오래된 물레방아인 '백전리 물레방아'를 힘차게 돌리고 흘러내려온 어천(魚川)이 있다. 말 그대로 물고기가 많은 내다.
어천의 물이 휘휘 돌며 만든 절경이 화암약수 옆의 그 유명한 '화암8경'이다. 그 풍경의 아름다움이 금강에 견줄 만하다 해서 '소금강'이란 별칭을 가진 곳이다.
이 어천이 정선읍에서 조양강과 만나기 직전 덕우리에서 정선 사람도 잘 알지 못하는 비경을 빚어냈다. 동네 분들이 '덕우 8경'이란 이름을 붙였지만 외부에 소문이 나지 않은 까닭에 여전히 한적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물줄기와 어우러진 수직의 절벽이 '그림바위' 화암만큼이나 절경이다. 정선에선 중국 계림의 풍경을 연상케 하는 이 석회암 암벽을 '뼝대'라 부른다. 겨울에 접어들고 물이 줄면 강변의 자갈을 따라 뼝대의 그늘 속으로 트레킹이 가능하다.
덕우 8경 뼝대 트레킹의 시작점은 옛 정덕초등학교 자리에 들어선 '정선영어체험학습장'이다. 이곳에 차를 대고 돌다리를 건너 강변으로 나섰다. 맑은 물줄기 위로 뼝대 그림자가 드리웠다.
공기가 무척이나 차가웠다. 강물이 이제 막 얼기 시작했다. 뼝대 밑으로 한발 두발 걸음을 옮긴다. 동강의 뼝대를 여러 번 봐 왔지만 이처럼 바로 밑에서 올려다 본 뼝대의 풍경은 또 다른 느낌이다. 가는 물줄기를 이리 넘고 저리 넘으며 좌우에 병풍을 친 뼝대를 탐닉한다. 돌다리가 잇지 못하는 곳에는 좁은 나무다리가 놓여져 있다.
다리를 건너며 물 속을 내려다 보다 깜짝 놀랐다. 살얼음 밑으로 몽글몽글 움직이는 까만 게 있어 유심히 바라보니 고기 떼다. 비닐하우스 역할을 하는 얼음 밑에서 찬 공기를 피한 채 따뜻한 볕을 쬐고 있는 놈들이다. 뜰채만 있었어도 발목이 아린 추위를 감수하고 텀벙 뛰어들었을 텐데.
한 굽이를 돌아간 뒤 다시 물 속이 시선을 잡아 끈다. 수초와 바닥의 침전물이 뒤엉켜 기괴한 모습을 만들어냈다. 터키의 카파도키아를 미니어처로 물 속에 옮겨 놓은 모습이다. 천불천탑이 이룬 수중의 왕국이다.
흐름을 느낄 수 없는 고요한 물줄기 위로 새 한 마리가 달음질 쳐 날아 오르며 정적을 깬다. 뼝대의 아래 부분이 굴처럼 움푹 패인 것은 거센 물줄기가 부딪쳐 만든 결과물일 것이다.
가만히 쳐다보니 뼝대에 가득 옥수수 수염 같은 것이 붙어 나풀거린다. '동강조랭이'다. 이곳에 동강조랭이가 있다면 쌍으로 함께 피는 '동강할미꽃'도 있을 것 같다. 봄이 오면 그 귀한 꽃이 정말 피는지 확인하러 다시 찾아와야겠다.
소의 혀처럼 툭 튀어나온 노루고개를 돌아설 때 덕우8경의 풍경은 절정을 이룬다. 뼝대가 서너 겹 겹치면서 묵향 그윽한 산수화를 그려낸다.
덕산기 계곡의 물줄기가 합수되며 물줄기가 넓어졌다. 건너편엔 외딴집 한 채뿐이다. 강가에 묶어 놓은 황소가 헤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울고 있다. 물을 건너려 했지만 돌다리는 끊겼고 나무다리도 놓여 있질 않았다. 낮은 물줄기엔 트럭의 바퀴 자국뿐. 겨울이 좀더 깊어져 얼음이 꽁꽁 얼었으면 걸어서 건넜을 텐데. 아쉬움을 뒤로하고 돌아섰다.
다시 감상하는 덕우8경. 보고 또 봐도 아름답다.
정선=글·사진 이성원기자
■ '피리 부는산' 취적봉엔 연산군 네 아들의 슬픈 전설이…
정선읍 덕우리 마을 건너편엔 피리를 부는 산이란 뜻의 취적봉(729.3m)이 있다. 이 산 이름의 유래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오른다. 연산군의 네 아들이 이곳에 유배됐다.
그들은 감자로 목숨을 연명하고 피리를 불며 고향 생각을 달래다가 중종이 내린 사약을 받고 결국 짧은 생을 마감해야 했다. 마을 건너편 석벽이 덕우8경 중 하나,그들이 피리를 불었다던 취적대이고 그 뒷산이 바로 취적봉이다.
취적대를 뺀 나머지 7경은 다음과 같다. 낙모암은 덕우리 백평마을 삼합수 강변에 모자 모양을 한 기암절벽이고, 제월대는 백평마을 강변에 암봉 사이로 달이 건너 다니는 깎아지른 석봉이다. 구운병은 대촌마을 강변에 아홉 폭 병풍을 세워 놓은 듯한 기암이고 옥순봉은 대촌마을 강변에 상투를 틀어올린 듯한 석봉이다.
반선정은 대촌마을 강변에 있는 정자 터로 주변을 조망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운금장은 유천마을에 있는 산으로 구름이 이 산봉우리 위로 피어 오르는 모습이 아름답다. 유천마을 중앙에 있는 백오담은 연못이 있던 자리로 옛날 연못에 흰 까마귀가 서식했다고 한다.
덕우8경 외딴집 쪽에선 덕산기 계곡을 따라 또 다른 뼝대 트레킹 코스가 시작된다. 뼝대는 규모는 작지만 아기자기한 맛이 빼어나다. 계곡을 따라 길이 포장돼 있어 차로도 7,8km는 오를 수 있다.
어천은 우후죽순 들어선 고랭지 채소밭 때문에 물이 많이 탁해졌지만, 덕산기 계곡은 오염원이 없어 정선에서도 알아주는 청정 계곡으로 남아 있다. 여름엔 계곡을 물이 가득 채우지만 가을 이후 갈수기로 들어서면 물은 지하로 빠져 건천으로 변한다. 그 계곡을 따라 겨울의 조용한 설산 트레킹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 여행수첩
● 덕산기 계곡 입구에 '물맑은 집'이란 민박이 있다. 이곳에서 숙박을 해결하거나 식사를 할 수 있다. (033)562-0744
● 정선 읍내 정선역 바로 옆에는 황기족발과 콧등치기국수로 유명한 동광식당(033-563-0437)이 있다. 황기를 넣고 삶은 족발이 닭고기를 씹는 듯 졸깃거린다. 콧등치기 국수란 연한 된장 국물에 굵게 칼국수처럼 뽑아낸 메밀국수를 넣어 내놓는 음식. 국수 가닥이 콧등을 친다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 중앙고속도로 제천IC에서 나와 태백 방향 38번 국도를 타고 가다 정선 문곡에서 59번 국도를 타고 정선선 철로를 따라 정선 읍내로 향한다. 거칠현동을 지나 '덕우리'라고 씌어 있는 비석을 따라 내려와 정선영어체험학습장 이정표를 찾아 들어가면 된다.
● 덕산기 계곡으로 가려면 424번 지방도로를 타고 정선읍 방향으로 나선다. 고개를 넘어 한 2km가량 가다 월통교를 건너 바로 우회전해 여탄 마을을 지나면 덕산기 계곡의 초입이 나타난다.
● 길을 찾기 어려울 것 같으면 전문 여행사를 이용해보자. 트레킹 전문 승우여행사는 덕우8경과 덕산기계곡의 뼝대 트레킹과 정선 5일장을 한데 묶은 상품을 출시했다. 당일 일정으로 7, 17, 2월 7, 22일 출발한다. 참가비 4만3,000원. (02)720-8311
이성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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