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성
무럭무럭 구덩이
- 이우성
이곳은 내가 파 놓은 구덩이입니다
너 또 방 안에 무슨 짓이니
저녁밥을 먹다 말고 엄마가 꾸짖으러 옵니다
구덩이에 발이 걸려 넘어집니다
숟가락이 구덩이 옆에 꽂힙니다.
잘 뒤집으면 모자가 되겠습니다
오랜만에 집에 온 형이
내가 한 눈 파는 사이 구덩이를 들고 나갑니다
달리며 떨어지는 잎사귀를 구덩이에 담습니다
숟가락을 뽑아 들고 퍼 먹습니다
잘 마른 잎들이라 숟가락이 필요 없습니다
형은 벌써 싫증을 내고 구덩이를 던집니다
아버지가 설거지를 하러 옵니다
반짝반짝 구덩이
외출하기 위해 나는 부엌으로 갑니다
중력과 월요일의 외투가 걱정입니다
그릇 사이에서 구덩이를 꺼내 머리에 씁니다
나는 쏙 들어갑니다
강아지 눈에는 내가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친구에게 전화가 옵니다
학교에서 나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구덩이를 다시 땅에 묻습니다
저 구덩이가 빨리 자라야 새들이 집을 지을 텐데
엄마는 숟가락이 없어져서 큰일이라고 한숨을 쉽니다
■ 당선소감/ "서른인데 세상이 참 아픕니다 살아서 지구를 지키렵니다"
이런 날이 안 오는 줄 알았습니다. 전화를 받고 엉엉 울다, 마음 가라앉히면, 또 눈물이 났습니다. 대학 다닐 때, 스쿨버스 안에서 매일 시집을 읽었습니다. '틈'이란 시창작 모임에도 나갔습니다. 사는 게 즐거웠습니다만, 시를 너무 못 써서 서러웠습니다.
제겐 시에 대해 이야기할 동기도, 등단한 선배도 없었습니다. '이 외로움은 내 거야, 동생들에겐 물려주지 말아야 해' 하며 늘 강한 척했는데, 속으론 무너지기 직전이었습니다. 당선한 것보다 '틈' 동생들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사실이 기쁩니다!
시답지 않은 작품 읽어주신 홍은택, 심재휘 선생님, 죄송합니다. '금요반'의 기둥 권혁웅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께도 몸 둘 바 모르겠습니다. 특히 조연호 '티처'에겐 거듭 감사해야 합니다.
겨우 서른인데 세상이 참 아픕니다. 살아야겠습니다. 살아서, 지구를 지켜내야겠습니다. 이영주, 이용준, 김한선, 자랑스런 '틈' 가족, 치열한 '금요반' 식구들, 눈부심 그 자체인 'GQ' 스태프들, 왁자지껄한 '문장의 소리' 팀, 좋은 친구는 나의 영예입니다. 아빠, 엄마, 형, 당신이 곧 나입니다. 등 두드려주신 박상륭 선생님,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10년을 매진하면 안 될 일이 없다, 말씀해주신 서범석 선생님, 그 진리가 저만 두고 갈까 무서웠다고 이제 고백합니다. 어느 오후, 대책 없는 제 시를 읽고 말없이 담배에 불을 붙이시던 모습이 자꾸 떠올라, 눈물이 납니다.
심사위원 선생님, 감사합니다. 종이야, 쉼표야, 말줄임표야, 오래오래 미안.
■ 인터뷰/ "투고 바로 전날 쓴 詩" 당선 통보에 감격의 눈물
"정말요? 흑흑… 정말인가요? 흑흑흑…"
당선을 통보하는 순간 수화기 건너편의 이우성(29)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한남대교를 지나 강북으로 운전 중이던 그가 좌회전 신호를 잇따라 놓치고 도착한 곳은 목적지 후암동이 아닌 안국동 부근이었다.
대학에 입학했던 1999년의 어느 봄날. "너 뭐 될래?"라는 1년 선배의 질문에 무심결에 튀어나온 "저 시인 하고 싶어요"라는 대답은 그를 10년 동안 시라는 언어의 감옥으로 몰아넣었다.
선배가 이끈 시 동아리 '틈'에서 시 공부를 시작한 그는 군 제대 후 선배도 떠나간 '틈'에 혼자 꽂혀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당선 소식을 듣고 그렇게 운 것은 저 하나만 보고 있는 후배들, 선생님 생각이 나서였습니다. 사실 그동안 100만번은 그만두고 싶었고 도망치고 싶었어요. 당선되면 말라죽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신춘문예에 응모한 지 4,5년째인 2007년 가을부터 이씨는 권효봉, 강정, 김경주 시인이 이끄는 시모임 '금요반'에 참가하며 자신의 시를 연단했다. 그는 지난해 한 언론사 신춘문예 최종심에 이름을 올렸을 때 자신보다 더 기뻐하는 '틈'과 '금요반' 선후배들을 보며 "시에서 도망치려는 마음을 다잡았다"고 털어놓았다.
구덩이와 모자의 이미지를 통해 가족들 각자가 안고 살아가는 걱정이 커져가는 과정을 담은 그의 당선작의 착상은 우연히 다가왔다. 다른 시를 고치던 중 '이곳은 내가 파 놓은 구덩이입니다'라는 구절이 떠올랐고, 한국일보 신춘문예 투고 전날 한숨에 써내려갔다고 했다. "좀 허탈했습니다. 한 구절 놓고도 일년 넘도록 썼다 지웠다 하는 게 시인데, 시라는게 그런 건가 봅니다."
잡지사 편집자로 4년째 일하고 있다는 그는 나무를 자신이 '편애하는 이미지'로 꼽았다. 피고 지고 다시 피고 지는 나무의 일생에서 사람의 그것을 떠올린다는 것. 때로 사무실 앞 소공원의 감나무와 은행나무를 만지고 어깨동무를 하고,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고 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고민을 나무에게 털어놓으면 나무는 흔들리기도 하고, 어떤 이미지를 주기도 한다고 했다.
"시가 없었으면, 제 삶이 어땠을까요. 회사와 집을 오가면서 기계처럼 살았을 텐데. 별로 좋은 일이 없었을 텐데. 그저 고맙습니다."
■ 심사평/ 희귀한 감각과 상상력… 신인다운 신선함 돋보여
시 부문 응모작은 양과 질이 모두 풍성하여 선자들을 즐겁게 했다. 응모작의 경향이 변화하고 있음을 확인한 것도 고무적인 일이었다. 최근 수년 동안 신춘문예나 문예지 응모에서는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포스트모던하고 전위적인 실험시를 흉내 내는 시들이 많았다.
실험정신과 발랄한 어법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젊은 시가 문단에 활력을 준 것은 긍정적이지만, 삶의 현장과 역동적으로 맞물리지 못하고 헛바퀴를 돌리는 듯한 아쉬움을 준 것도 사실이다.
이번 응모작들에서는 이런 흐름이 크게 줄어든 반면 삶의 현실을 체감하거나 강하게 끌어당겨 미적으로 형상화하려는 시도는 상대적으로 늘었다. 이것은 기존의 역량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시적 경향이 변화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의 경제적인 어려움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까지 논의된 작품은 이우성의 '무럭무럭 구덩이'와 장예은의 '만월'이다. 이우성의 시는 감각과 상상력이 희귀하고 개성적이며 생기있고 활력이 있다. 목소리도 힘있고 거침없고 속도감과 리듬감이 있어 신인다운 신선함이 돋보였다.
장예은의 시는 꿰맨 자국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우면서도 세련된 섬세함과 발랄함을 갖고 있다. 밝고 싱그러운 서정적 감각도 인상적이었다. 가장 완성도 높은 한 편을 고르라면 주저없이 손이 갈 만한 작품이다.
논의를 거듭한 끝에 이우성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함께 응모한 그의 다른 작품들이 편차 없이 고르게 살아있는 감각을 보여주어 앞으로 계속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이 컸기 때문이다. 장예은의 다른 작품들은 기복이 있어 끝까지 믿음을 주지 못했다.
오윤희의 '뫼비우스의 띠'와 박은지의 '열쇠 도적'도 만만치않은 역량을 보여주었다. 앞의 시는 시사적인 내용을 풍자적으로 재치 있게 드러냈으나 거친 것이 흠이며, 뒤의 작품은 안정적이고 참신한 목소리를 지녔으나 산만하여, 각각 논의에서 제외되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더욱 정진하기를 바란다. 뜻을 이루지 못한 응모자들에게는 용기를 잃지 말고 다시 도전해줄 것을 당부한다.
● 심사위원 신경림(시인) 김사인(시인ㆍ동덕여대 교수) 김기택(시인)
이왕구 기자
사진 배우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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