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의 지축이 흔들리고 있다. 방아쇠를 당긴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금융산업의 몰락은 지난 한 세기 동안 굳건했던 미국의 ‘슈퍼 파워’에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유럽, 중국, 일본, 인도 등은 다가 올 100년의 새 경제 질서를 지배하겠다며 ‘포스트 미국’을 향한 도전장을 내밀었고, 중동 산유국과 아시아 신흥국들은 이 기회를 틈타 위상 강화에 적극 나서고 있다.
금융위기는 수십년간 누적돼 온 미국의 고질병을 한꺼번에 노출시키고 있다.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쌍둥이 적자(경상ㆍ재정수지 적자)가 더욱 확대될 수밖에 없고, 세계 기축통화로 ‘100년 천하’를 누려 온 달러화의 위상 약화도 불가피하다. 첨단 금융공학으로 무장한 미국의 자존심 ‘월 스트리트’는 아시아 자본과 중동 오일머니에 손을 벌려 연명하는 처지가 됐다.
지난 해 11월 중순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선진ㆍ신흥 20개국(G20) 정상 회의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더 이상 미국과 몇몇 선진국만의 힘으로는 이 거대한 위기를 돌파할 수 없다는 항복이나 다름 없었다.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G20은 역사적 전환의 의미를 지닌 회의”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거대 미국’ 주도의 단극 체제가 다극 체제로 바뀌는 ‘패턴 세팅’의 장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위기 이후 세계경제의 지도는 어떻게 바뀌게 될까. 더 이상 미국이 혼자 세계경제를 이끌어가는 독주 체제는 유지될 수 없다는 게 중론이다. 미 국가정보위원회(NIC)는 최근 ‘글로벌 트렌드 2025 전망 보고서’에서 “미국이 홀로 국제질서를 끌고 나가는 시대는 끝났다”고 단언했다.
그렇다 해도 수년 내에 미국의 패권이 급격한 해체 과정을 밟고, 미국을 대체할 새로운 슈퍼 파워가 등장할 가능성은 많지 않다. 김득갑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한 국가가 패권국이 되기 위해서는 경제는 물론이고 군사, 기술, 문화 등에서 압도적인 우위가 뒷받침돼야 한다”며 “1차 대전 이후 제1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던 미국이 19세기 패권국인 영국으로부터 실질적인 패권을 넘겨받기까지는 20~30년 정도의 시차가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적어도 경제력 만큼은 10~20년 내에 중국이 미국을 앞서고, 유럽과 인도가 뒤를 바짝 쫓는 각축전 양상이 유력하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중국이 2026년에 미국 경제를 추월해 세계 1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하고, 인도는 2023년 일본을 넘어서 유럽에 이은 세계 4위 경제대국으로 올라설 것으로 내다봤다.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도 중국의 경제력이 미국을 추월하는 시기를 2025년으로 내다봤다.
역사적으로 경제력이 국가 패권에 선행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결국 향후 수십년간 세계경제는 단극 체체에서 다극 체제, 혹은 리처드 하스 미 외교관계위원회(CFR) 의장이 언급한 무극 체제에 돌입할 가능성이 높다. 권영준 경희대 국제경영학부 교수는 “미국 중심의 1극체제가 해체되면서 앞으로 세계경제 질서에는 불확실성이 증대할 것”이라며 “미국과 유럽,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등 다극화된 핵심 리더들이 협조하는 새로운 지구촌 지배구조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세계경제 질서의 지각 변동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우리나라에게도 향후 50년, 100년이 달려 있는 중차대한 문제다. 격변하는 지금의 상황은 우리에게 위기인 동시에 무한한 도전의 기회인 셈이다.
이영태 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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