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한해를 마감하면서 한국의 지성사회를 걱정해본다. 기우(杞憂)일 수도 있고 주제넘을 수도 있지만, 한해를 반추(反芻)하는 자의 목젖에 "지성사회가 죽었다"는 생각이 꽉 걸린다. 감히 지성사회의 조종(弔鐘)을 운위하는 이유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침묵과 외면 때문이다.
지성사회를 힐난할 때 인용되는 고사인 곡학아세(曲學阿世)나 지록위마(指鹿爲馬)가 떠오른다. 학문을 굽혀 세상에 아첨하거나 힘있는 자가 사슴을 말이라 해도 침묵한다면 그런 지성은 죽은 거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우리 사회가 모조리 잘못됐고 지성사회가 이를 모두 외면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몇몇 중요한 가치를 놓고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보수의 대표적 이론가나 논객들이 보수정부 1년 동안 보수의 가치가 오도되는데도 입을 다물고 있다는 점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한국의 보수는 선진화와 경제회복을 내걸고 집권했다. 경제회복의 문제는 사상 유례없는 금융위기 앞에서 잘했느냐, 잘못했느냐를 평가하기는 이르다. 그러나 선진화 철학은 그 본질이 많이 훼손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경쟁, 질서, 성장 등 보수의 가치이자 선진화의 핵심적 요소들이 나름대로 싹을 틔웠다는 평가는 가능하다. 하지만 선진화의 중심 주제인 법과 제도, 절차의 중요성이 많이 간과됐고 아울러 선진화의 철학인 자유주의도 오히려 위축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적시하자면 임기제의 무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속담처럼 전 정부 사람들이 알아서 물러났어야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정치적인 성향이 아닌 전문성에 의해 임명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런 이들도 물러나지 않겠다고 했을 때 유무형의 압박을 받았고 오비이락(烏飛梨落)의 오해를 살만한 감사나 수사가 뒤따르는 경우도 있었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자리가 아닌 위원회나 단체까지도 임기는 별 의미가 없었다.
임기는 왜 두었을까. 외부적 영향을 받지않고 소신있게 일하라는 취지로 도입됐고 그게 절차와 제도의 본질이다. 임기제가 무너지는 것은 절차, 제도의 형해화(形骸化)를 의미하며 이는 보수의 가치와도 배치되는 일이다.
그러나 백번 양보하면 정치는 그럴 수 있다. 몇 년 전으로 시계를 돌리면 지금 여야가 하는 말들이 180도로 바뀌어 있는 걸 알 수 있듯이 정치는 권력이라는 어마어마한 과실 앞에서 논리를 밥 먹듯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보수의 지성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몇 년 전 임기제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물론이고 이른바 낙하산 인사, 회전문 인사에 대해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퍼부었던 일을 되새겨보면 그 침묵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인사만 그런 게 아니다. 사상적 문제에서도 보수의 가치는 훼손됐다. 좌파적 역사교과서를 수정하는 데 토론과 논리가 아닌 강압이나 대세몰이가 주조를 이루었다. 이는 보수가 그토록 비난했던 집단주의나 포퓰리즘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다. 과거에 절차, 제도를 경시한 채 대중조작과 분위기로 나라를 끌어가는 위험성을 경고했다면 지금 그런 경향이 나타났을 때도 동일한 우려와 지적이 있어야 한다.
그런 역할이 작게는 보수정권에, 크게는 나라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보수의 지성사회가 '가재는 게' 편이라는 식의 논법에 매몰돼 있다면 너무 초라하지 않을까 싶다.
이영성 부국장 겸 정치부장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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