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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 콩트/ 소시민 구보씨의 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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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 콩트/ 소시민 구보씨의 황소

입력
2009.01.08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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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 기축년, 소와 함께 소처럼 가자!

여기는 우리의 소시민 구보 씨의 집이다. 한 해가 가는 마지막 날 저녁 구보 씨는 저녁을 먹은 다음 온 가족을 다시 식탁으로 불렀다.

"무슨 일이에요? 아빠."

중학교 3학년인 딸이 물었다. 내년이면 고등학교엘 간다. 그 위에 대학 2학년짜리 아들이 있다.

"오빠도 오라고 해. 여보, 당신도 오고."

그렇게 네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았다. 아내 소심녀 씨가 커피와 과일과 과자를 준비했다.

"와. 이러니까 오늘이 무슨 날 같아요. 밥 먹을 때 말고는 온 가족이 이렇게 앉아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밥 먹을 때도 우리 네 식구가 다 같이 앉아 먹은 적이 많지 않아."

딸의 말을 받아 소심녀 씨가 말했다. 아침은 집을 나가는 순서대로 구보씨, 딸, 아들이 저마다 개별식사를 하고, 저녁 역시 집으로 돌아오는 순서대로 아들, 딸, 구보 씨가 개별식사를 했다. 휴일 아침이거나 저녁에 어쩌다 한번 온식구가 함께 밥을 먹는데 그것도 많아야 한 달에 두세 번이었다.

촛불… 강부자… 경제위기… 격랑 2008년온가족이 오랜만에 둘러앉은 식탁에선가슴 조마조마했던 이야기들 주마등처럼…

"이렇게 모이라고 한 것은 한 해가 가는데, 올해 우리집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저마다 돌아보고 고칠 건 고치고, 내년에도 계속 이어나갈 건 더 열심히 하자는 뜻으로 불렀다."

"나는 너희 아빠 건강하고, 또 너희들 공부 잘하고 건강하고 그러면 더 바랄 게 없어. 지난 여름처럼 속만 안 썩이면."

"지난 여름에 뭐?"

딸이 항의하듯 엄마에게 물었다.

"너 공부는 않고 매일 청계천에 촛불 들고 나갔잖아. 중학생이 한밤중 넘어 들어오고. 그때 엄마가 하루하루 사는 게 얼마나 불안했는지 알아? 너도 마찬가지고. 내가 너 물대포 맞는 모습 화면으로도 봤어. 그때 엄마 마음이 어땠는지 너희들이 아니?"

구보 씨의 아내 소심녀 씨는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후들후들 떨린다. 아들 혼자 집중적으로 맞은 건 아니지만 저쪽에서 분사되는 물줄기가 시위대쪽을 향할 때 한 젊은이가 그 물줄기에 비틀 몸의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났다.

뒤쪽에서 잡은 화면이라 얼굴 모습은 나오지 않았지만 틀림없는 아들이었다. 나중에 아들은 자기가 아니라고, 자기는 그 물줄기를 맞고 쓰러진 적이 없다고 우겼지만 이 세상에 뒷모습만 보고도 그게 아들인지 아닌지 구별 못할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그날 집에 돌아온 아들의 청바지 허리춤이 아직 덜 말라 축축하게 젖어 있었는데 말이다.

"엄마는 지금 청와대 대변인처럼 그게 다 우리 탓인 것처럼 말씀하시는데요, 그렇게 말하면 우리도 할 얘기가 참 많아요. 하여간 그 일은요, 어륀지 파동에 강부자 고소영 내각이 747보잉기 타고 등장할 때부터 이미 한 코스로 진행된 일이었다구요."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어린지 파동에 보잉기라니."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오직 내 앞닦음만 하지 세상 일엔 도통 어두운, 그래서 남들 다 아는 유머나 유행어조차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처럼 늘 생뚱하게 여기는 구보 씨가 아들에게 물었다.

"아빠, 어린지가 아니고, 오어륀지,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여기 엄마가 식탁에 가져다놓은 오렌지 있죠? 미국에 가서 이걸 그냥 오렌지 주세요, 하면 안 줘요. 오어륀지, 이렇게 말해야 주는 거예요. 어떤 대학 총장님이 그랬거든요. 그래서 국어도 영어로 가르쳐야 한다는 말이 나온 거구요."

"아, 그 얘기…"

그제서야 구보 씨가 아들과 딸이 하는 얘기의 감을 잡았다. 그때 신문에도 자주 났었던 얘기였다. 전철에서 신문을 보며 구보 씨는 소시민의 본분대로 그 일을 한 나라의 교육과 관련하여 생각하기보다 아, 말 한 마디에 사람이 이렇게 전국적으로 조롱을 당할 수도 있구나, 그래서 말이라는 건 늘 조심해서 뱉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일단 아들의 말에 감을 잡자 747 타고 온 강부자 고소영 내각에 대해서는 다른 설명 없이도 알 것 같았다. 지난해 선거 때 대통령은 7%의 경제성장에 4만달러의 국민소득에 세계 7대 경제대국으로 나라를 이끌겠다고 공약했었다. 사람들이 그 공약을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 구보 씨는 알 길이 없다. 아니 사람들은 믿고 싶었을 것이다. 구보 씨도 그랬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강부자 내각' '고소영 내각'이었다. 그 말의 뜻이 '강남 부자들의 내각'과 대통령이 나온 고려대와 대통령이 다니는 소망교회에 대통령과 고향이 같은 영남 사람 일색의 내각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에도 구보 씨는 소시민답게 내가 나라 일에 뭘 알겠어? 하면서 그때그때 사람들이 말 지어내는 재주에만 탄복했다.

세상 일에 늘 표정없이 덤덤하던 구보 씨가 직접 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바로 광우병 사태와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파동이었다. 어느 날 중학생 딸이 저녁마다 청계천으로 나갔다. 구보 씨는 처음엔 그 일을 몰랐다.

"얘가 이상한 거 같아요. 저녁에 학원도 안 가고 청계천에 나가 촛불을 드는 것 같아요."

아내 소심녀 씨가 말해주어서야 알았다. 부모 입장에서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얼마 뒤엔 대학생인 아들까지도 촛불에 합류했고, 그런 아들이 물대포를 맞는 장면을 엄마 소심녀 씨가 보았던 것이다.

구보 씨 젊은 시절, 그때는 정말 대학의 하루가 시위에서 시작해 시위로 끝났다. 그래서 다친 사람도 많고 끌려가 잘못된 사람도 많았다. 그때에도 구보 씨는 세상의 그런 일과 담을 쌓고 살았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벌렁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러나 그때에도 세상은 그런 사람들과 그런 친구들의 힘과 의지에 의해 아주 조금씩 발전적인 방향으로 변해 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천성이 소심하여 나서지 못했던 거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젊은 날 그는 늘 친구들에게 부끄럽고 세상에 부끄러웠다.

IMF때같이 "아빠 힘내세요" 애들 뜻밖 재롱누구보다 소심한 우리 구보씨 마음 안에가장 힘센 황소 한마리가 이미 들어와 있다

그러나 내 아들과 딸이 그런 일에 나서는 건 자신이 젊은 시절 그런 일에 늘 숨기만 했던 것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나중에 아들이 말했다.

"그래도 그때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반대가 30개월 넘은 소의 고기 수입을 막은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욕하던 사람들도 자기가 욕하는 사람들 덕에 더 나은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된 것도 틀림없는 일이지요."

어쨌거나 미국산 쇠고기 파동은 이 집에 마음의 큰 상처를 남겼다. 엄마가 아들이 물대포를 맞는 장면을 보았고, 딸은 이후에도 미국산 쇠고기든 호주산 쇠고기든 한우든 어떤 쇠고기도 입에 대지 않았다.

"못 먹겠어, 엄마."

아마 영원히 그럴 것 같지는 않고 보다 성장하여 지난 여름에 받았던 마음의 상처에 대해 자기 치유를 끝낼 때까지 당분간 딸아이는 쇠고기를 먹지 못할 것이다. 그 나이가 대개 그렇지만 구보 씨와 소심녀 씨의 딸답게 감수성이 예민했다.

배우 최진실 씨의 자살도 소심녀 씨를 많이 놀라게 했다. 그게 배우 안재환 씨의 자살에 이은 일이라 더욱 그랬다. 압박붕대가 그런 흉기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그때 신문과 텔레비전을 보고 알았다. 어느 신문은 마치 자살을 하려거든 이 압박붕대로 이렇게 사용하십시오, 하고 자살 가이드를 하듯 사용방법과 그것을 구입하는 방법, 가격까지도 아주 자세하게 가르쳐주었다.

소심녀 씨는 지난해 눈길에 발목을 삐끗해 며칠 두르고 다녔던 압박붕대를 구급상자 속에 그대로 두고 있는 것이 마치 집안에 흉기라도 두고 있는 것처럼 께름칙해 그것을 손끝으로 외면하듯 집어 쓰레기 봉지 속에 넣었다.

"당신 나 모르게 사채 같은 거 쓰는 거 없지요?"

"당신 나 모르게 마음에 고민 담고 있는 거 없지?"

소심한 남편과 소심한 아내가 서로 그렇게 묻기도 하고, 또 여러 날 저 사람이 나 모르는 어떤 고민을 안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살피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 닥친 일이 미국발 세계 경제위기였다. 이 일이야말로 구보 씨가 모른 척할래야 모른 척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구보 씨 나이, 해가 바뀌면 꽉 찬 쉰이었다. 드디어 쉰세대가 된 것이다. 다른 건 다 모른 척해도 오륙도니 사오정이니 하는 말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가지고 있는 건 겨우 서울 외곽에 집 한 채뿐이었다. 거기에 대학생 아들이 있고, 고등학생 딸이 있었다. 아직 돈 들어가야 할 데가 많았다. 아이들 교육비가 전에도 지금도 가장 큰 부담이었다.

세상 살아가며 할 줄 아는 거라곤 회사에서 성실하게 사무를 보는 일뿐인데, 만약 회사 사정이 지금보다 더 악화되어 구조조정을 한다면, 정말 생각만 해도 등에서 저절로 땀이 흘렀다.

한 해가 가는 오늘 저녁 식탁으로 가족을 부른 것도 그런 마음의 압박과 이런저런 심란함 때문이었다. 아들의 말대로 '강부자'와 '고소영'을 태운 한국 새정부의 747보잉기가 추락하여 미네르바의 '주가 747 악몽'으로 패러디된 것도 바로 바다 건너에서 온 미국발 세계 경제위기 때문이었다.

지금 반타작으로 내려오고 있는 버블 지역의 아파트를 2년 전 최고점 가격에서 은행융자를 절반 끼고 그것을 잡은 옆 부서 김차장의 경우는 남의 일이라도 정말 딱해 보였다.

그렇게 되면 명의만 자기 집이지 은행에 다달이 이자를 내며 남의 집에 월세를 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돌아보면 근래 나라 경제의 부담이고 가계마다의 부담이 되고 있는 아파트 투기 열풍이라는 게 구보 씨 눈으로 보자면 그랬다.

한 해 열심히 일을 해서 번 돈에서 아끼고 아껴 최소한의 생활비를 쓰고도 연간 저축을 1,000만원도 하지 못하는 보통살림의 가정들이 복권 맞듯 한꺼번에 큰돈을 벌고 싶은 허황된 욕심들이 대개 저마다 한 채뿐인 아파트 가격만 왕창 올려놓?그것의 허수에 흐뭇해하다가 갑자기 닥친 가격 폭락에 비명과 울상을 짓는 모습이었다.

허수로라도 가격이 오를 땐 높은 이자부담 속에서도 그 허수로 위안받았지만, 지금은 가격은 가격대로 폭락하고 은행빚은 은행빚대로 줄지 않고 남아 매달 살인적인 이자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김차장에 비하면 구보 씨야말로 한평생 소심한 성격 그대로 돌다리도 두드려가며 살아왔다.

"당신이 건강하면 우리집이 건강한 거고, 당신이 안전하면 우리집도 안전한 거예요. 올해도 그랬고, 내년에도 그럴 거예요. 예전에는 당신이 왜 남들 다 하는 그런 투자도 하지 못할까, 남들이 그런 투자로 1억 벌었다, 2억 벌었다 할 때마다 말은 하지 않아도 속도 좀 상하고 그랬는데, 지금 생각하면 당신이 참 잘 살아왔고 또 바르게 살아왔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고맙구요, 당신."

소심녀 씨가 남편 구보 씨의 손을 잡았다.

"아버지가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얼마나 힘들지 저희들도 잘 알아요."

"그래요, 아빠. 저 이제 고등학교에 가면 공부 열심히 할게요. 그러니 저희 보고 기운 내세요, 아빠. 엄마 말대로 아빠가 건강하시면 우리도 건강하고, 아빠가 웃으면 우리도 웃어요."

"그래, 너희들 그 말로 아빠 다시 기운 낸다. 아빠가 술을 잘 못하지만, 오늘은 우리 아들하고, 또 엄마하고 같이 술이라도 한 잔 할까?"

"아빠, 나는?"

"너는 어륀지 주스 마시고."

아들의 그 말로 마음이 무겁던 구보 씨도 빙긋 웃을 수 있었다. 한 해가 가는 마지막 날 저녁, 구보 씨 집 거실에서 구보 씨의 아들과 딸은 10년 전 IMF 때 아빠 앞에서 재롱 떨듯 불렀던 노래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하는 노래를 어릴 때의 율동 그대로 불렀다.

이 밤이 가면 새해가 온다. 소처럼 부지런히, 또 우직하게 뚜벅뚜벅 걷다보면 어떤 어려움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의 응원 속에 누구보다 소심한 우리 구보 씨 마음 안에 이 세상에서 가장 힘센 황소 한 마리가 이미 들어와 있다.

오라, 기축년. 소와 함께 소처럼 가자!

이순원ㆍ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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