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음(知音).
벗이 거문고를 타면, 그 소리를 다 알아 듣는다는 옛 중국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명창 안숙선(59)씨가 '육자배기' '흥타령' 등의 소리를 모아 2000년에 발표했던 CD의 제목이기도 했다. 27일 오후5시 세밑의 국립국악원 우면당을 휘감던 삭풍을 내몰았던 것 또한 지음의 열기였다.
좋은 국악 공연이 있으면 어디서든 달려오는 귀명창들이 신인 여자 가객 김현주의 탄생을 지켜보고 있었다. 남자도 하기 힘든 우조(羽調)의 헌걸찬 가락이 좌중을 압도해갔다. 도원결의 대목으로 구성지게 넘어가자, 추임새가 절로 터져나왔다.
객석 한가운데 자리잡은 안숙선(59ㆍ중요무형문화재 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예능 보유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음악과 교수)씨는 무대를 응시하고 이었다.
그러잖아도 연말 송년음악회 등의 빡빡한 일정에 피로가 쌓여가던 차에 애제자의 노랫가락이 자장가였던가, 눈꺼풀이 감기면서 그는 노래 속으로 빠져들었다. 판소리 다섯 바탕 완창에 전수까지 감당하는 여장부에게 모처럼 쉴 기회가 온 것이다.
다음은 안숙선씨와 공연 직전 나눈 말이다. 그는 국악의 변화와 생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적통으로서 그의 존재는 귀하다.
- 당신은 창극의 대명사다. 창극은 어떤 예술인가.
"1975년 국립창극단 입단으로 맺어진 인연이다. 당시 단역인 초라니로 나와 꽹과리 치며 민요를 불렀다. 그러나 박동진 선생님으로 대표되는 전래 판소리 열두마당에는 외설적인 말이 많아 꺼려왔는데, 창극은 그것을 이를테면 순화시킨 결과물이다. 유네스코 무형문화재로 등재된 판소리를 우리의 대표적인 몸짓에 실은 셈이다."
- 19일부터 28일까지 '안숙선과 함께하는 변강쇠전'을 공연했는데 거기서의 역할은.
"원래 옹녀 역을 하려 했다. 그러나 11월부터 해온 브라질, 일본 공연과 맞물리고 이제는 나이도 안 맞아(옹녀는 20대다), 해설자 격인 도창(導唱)으로 나섰다."
- '변강쇠전'은 당신의 국립창극단 입단작이기도 한데, 33년 만에 다시 하는 소회는.
"당시 창을 만드셨던 박귀희 선생, 옹녀 역의 오정숙 선생은 세상을 뜨시고 그 뒤를 조상현, 남해성씨가 잇고 있다. 강산이 세 번 바뀐 뒤, 오늘의 관객들이 창극을 올바르게 이해하게 하는 데 초점을 둔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의 김석만 교수가 연출을 맡았다."
- 창극의 원형을 찾아간다는 말인가.
"흔히 알고 있는 대규모 마당놀이 식의 창극이 아니라, 1인 다역이 원칙이었던 150년 전 초기의 모습대로 한다. 배우 8명에 악사 6명이 펼치는 무대의 맛이 새롭다."
- 지난해 서울시가 남산국악당을 열면서 당신 이름을 내걸고 창극 공연을 하려 했는데.
"고마웠지만 일정이 허락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는 매 연말에 창극을 고정적으로 선뵐 생각이다. 해보니, 경제 여건이 부쩍 어렵고 날씨도 추운데 300석 중 250석은 찬다."
- 인기 비결은.
"무대예술의 맛을 살리는 데 있는 것 같다. 특히 아주머니들이 뒤집어지는데,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 변강쇠와 옹녀의 '기물 타령', 그림자극으로 나타낸 남녀의 희롱 대목 등에 대한 반응은 압권이다. 내년에는 더욱 재미난 작품을 선보일 생각이다.
소규모라 기동성이 좋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모두 20명 남짓한 단원들이 발빠르게 움직이니, 지방이나 해외 공연에서 특히 강하다. 대편성으로 하자면 배우 50명, 악사 10명, 기타 스태프 등 해서 150~200명은 필요하다."
- 요즘 관객들과 어떻게 통하나.
"가장 쉬운 현대어가 목표이다 보니 유행어도 쓴다. 막간에 '남산골 시스터즈'니 '리얼리티가 있는 판타지'라느니 하며, 내가 즉흥적으로 객석에 던지는 말이 좋은 예가 되겠다. 그것은 원 텍스트가 고단수 코미디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세대별로 반응하는 방식이 다른데, 그것을 보는 것도 큰 재미다."
- 타 장르와의 만남에 어느 국악인 못지않게 진보적인 족적을 남겼다. 어떻게 시작됐나.
"호형호제하며 지내는 사물놀이의 김덕수씨가 적극 제의했다. 1995년 미국의 재즈 그룹 레드선과 함께 '토끼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수궁가 중 한 대목을 불렀다. 서양의 재즈 뮤지션들이 우리 음악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도와주고 빠지는 시점을 즉흥적으로, 본능적으로 알고 있더라. 첫 만남에서 화합을 이뤄냈던 것은 그래서다. 발표되자 특히 가수들이 '국악에 저런 것도 있구나' 하며 호응해왔던 기억이 난다. 자진모리 대목은 엄청나게 좋아하더라."
- 최근에는 어떤 무대를 가졌나.
"지난해 미국 휴스턴 국립박물관에서 한국관을 열면서 초청이 왔다. 'Rabbit Story'라는 제목으로 수궁가 한 대목을 들려주었고, 가야금 병창과 판소리 무대도 선보였다. 그런 식으로 그 곡은 지금까지 10여 차례 무대에 섰다.
내가 그런 일을 한 것은 한정돼 있는 판소리와 창극 관객의 저변 확대를 위해서다. 우리 음악을 알리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내 시도 중 어떤 것은 살아남아 새로운 전통을 형성할 수도 있다는 믿음이었다. 사실 다른 음악과의 만남은 초창기 국립창극단 시절에는 어른들의 반대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88올림픽을 계기로 인식이 확 달라졌다."
- 그같은 작업의 결산을 한다면.
"우리 음악을 돋보이게 하는 편곡이 전제돼 있지 않다면 곤란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영화 '서편제' 같은 작품처럼 전통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우리 것을 대중에게 알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다른 음악과의 만남에서 나도 상대도 서로의 음악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더욱 절감하게 됐다. 내 음악을 돌아볼 계기가 돼 내 음악의 실체를 보다 깊이있게 생각하게 됐다."
-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실은 1990년대 초에도 김희조씨 편곡으로 수궁가, 사랑가, 남도 전통민요 등을 현대화해서 불렀다. 그러나 나는 판소리 전통을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 그것은 수많은 명창들이 발전ㆍ축적시켜온 결과다.
요즘 일부 젊은 국악인들이 퓨전이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활동을 보노라면 가슴이 아프다. 그렇게 된 것은 국악을 사랑해 전공까지 하게 된 후배들이 전통을 올곧게 살려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좁기 때문이다."
- 현실적 해결책은 없는가.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대학 졸업 이후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나 원래의 우리 모습으로 나아가도 충분히 아름답다는 점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머리에 둘러 쓰는 무선 마이크를 사용해 달라는 제의도 있었지만, 나는 거절한다.
한복과 도저히 맞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원래의 것이 변형 없이 살아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나의 판소리 다섯 바탕을 그대로 살렸다. 거기 본래의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판소리를 랩으로 변형한 '흥부가 기가 막혀' 식은 아니다."
● 나의 국악 살리기
안숙선씨는 새 판소리의 꿈을 꾸고 있다. 고전과 현대물, 뮤지컬에 버금가는 대작과 정제된 소규모 무대 모두 고려중이다. 춘향전이나 심청전에 버금가는 작품이 가능하다는 믿음이다. 그의 말을 빌리면 "21세기 한국인의 심금을 울릴 내용을 담은 창극"이 탄생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때마침 올해 초 논개의 고향 장수군의 논개선양회로부터 '창극 논개'를 짜 달라는 부탁이 왔다. 논개를 비장미 가득한 애국자가 아니라, 한국적 해학이 가득한 주인공으로 되살려내는 일이다.
그는 이 일에 매달려 2시간짜리 작품으로 만들어 둔 상태다. '판소리의 멋을 제대로 알릴 최선의 수단은 창극'이라는 신념으로 한 일이다.
창작물 공연을 전제로 한 국악 전용관 문제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전용관 건립은 후대 국악인에 대한 선배로서의 도리라고 했다. 우리 자신의 본령을 어릴 적부터 친근히 만날 수 있는 장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어릴 적부터 귀명창을 길러내는 일이에요."
유치원에서부터 우리 악기, 몸짓, 소리의 기본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대중매체를 통해 우리 음악의 재미를 알리는 작업도 소중하다. "나이가 들면 자연히 좋아지는 게 우리 음악이죠."
그는 명창 박귀희씨가 사재를 다 털어 기부, 국악예고 설립에 결정적 도움을 준 일을 상기시켰다. 요즘 국악계 원로들과 만나면 으레 국악 살리기가 단골 주제다. "이제는 구체적 방법을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마음을 한 데 모아야죠."
하나의 실례를 제시했다. 판소리의 눈대목(하이라이트)만 모은 공연이 좋은 예다. 1970년대 이후 박동진씨가 주축이 된 판소리 완창 공연(7~8시간)에 힘이 실리다 보니, 도외시돼 온 눈대목 무대 형식을 이제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는 제안이다.
그에게는 전성기였던 30~40대 때에는 공연 한 번 하고 나면 귀명창들의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갓 쓴 시골 노인들이 무대 뒤까지 찾아와 '나이도 묵지 마라'며 이뻐했다"고 한다. 그 같은 기억이 여전히 그를 지탱시켜 주는 힘이다.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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