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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40> '세월이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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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40> '세월이 가면'

입력
2009.01.01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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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세월이 가면> 은 그렇게 시작하고 있다. 박인환씨가 시를 쓰고 이진섭씨가 곡을 붙인 노래다. 즉흥으로 만들어진 시에 즉흥으로 작곡을 했고 마침 그 자리에 있던 가수 나애심씨가 즉흥으로 노래를 불렀다. 1956년의 일이다.

서울의 명동은 그 당시 전쟁의 상처에서 겨우 회복하고 있는 중이었다. 9ㆍ28 수복직후 언덕위에 우뚝 솟아 있는 명동성당과 국립극장, 그리고 몇 개의 건물만 남고 모두 불에 탔거나 부서져서 폐허가 됐던 거리가 그럭저럭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을 무렵이다. 다방이 생기고, 술집들이 생기고, 달러 골목과 헌 잡지 파는 골목이 생기고, 옷 가게들도 많이 생기기 시작할 때다. 마땅히 갈 곳도 없고 친지들의 안부도 궁금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 명동이었다.

이진섭과 박인환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이는 이진섭이 서너 살 위였으나 형제처럼,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었다. 둘 다 신문기자를 했는데 박인환은 도중에 그만두고 '마리서사'라는 책방을 차렸다가 그나마도 적자를 견디다 못해 남한테 인계해 버리고 만다. 두 사람은 매일 명동입구에 있는 주점에서 살다시피 했다. 어느 날 박인환이 평소답지 않게 매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시 '목마와 숙녀'를 좋아하는 여인과 피난통에 헤어졌다가 얼마 전에 우연히 만났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시가 '세월이 가면'이고, 이진섭이 즉석에서 곡을 만들었다. 나애심이 그 자리에서 노래를 불렀지만 처음 레코드 취입은 가수 현인이 했다. 그 후 여러 가수들이 이 노래를 취입했고 한참 뒤인 1970년대에 와서 박인희가 불렀다. 지금은 박인희 노래로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다르다.

시인 박인환은 많은 시를 쓰지는 않았지만, 데뷔작인 '거리'를 비롯하여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부르짖는 '목마와 숙녀'라든가 '세월이 가면'등 현실적 낭만주의 형태의 시를 썼다. 그는 친구와 영화를 좋아했으며 술 없이는 하루도 견디지 못했다. 유난히 조니워커라는 스카치위스키를 좋아했지만, 주머니 사정으로 막걸리나 소주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진섭이 만든 곡을 듣고 그는 매우 좋아 하면서 술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합창을 하기도 했다.

나는 박인환 시인을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워낙 이진섭 선생으로부터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여러 번 만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박 시인은 훤칠한 키에 아주 잘 생긴 미남이었다고 한다. 나는 이진섭 선생을 가까이서 뵐 기회가 많았다. 가까이서 뵐 정도가 아니고 한때는 거의 매일 회동을 했다. 그 분은 우선 나의 언론계 대 선배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신문뿐만 아니라 방송출연을 많이 한 것도 내가 그분을 따라서 한 꼴이 되었다. 방송국(서울 중앙방송, 지금의 KBS) PD와 DJ를 했고, '장미빛 인생'등 라디오 연속극을 쓰는 작가로도 활동을 했다. 그야말로 팔방미인이었다.

나하고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에디트 피아프, 줄리에트 그레코와 함께 프랑스의 3대 여자 샹송 가수 중의 하나로 공인되는 이베트 지로(Yvette Giraud)는 한국공연을 세 번 가졌다. 1960년대 초에 처음 방한해서 명동에 있는 국립극장에서 첫 번째 공연을 가졌는데 이때 이진섭 선생이 통역을 하고 사회를 겸했다. 원래 이 선생은 음악을 엄청나게 좋아했고 그 중에서도 클래식과 샹송을 매우 사랑했다. 샹송 지식은 전문가 급이었다. 그래서'세월이 가면'도 샹송 분위기이다. 그의 부인인 소설가 박기원 여사에 따르면 술 마시고 집에 들어와서 적어도 한 시간 정도는 음악을 틀어 놓고 지휘를 하고 나야 잠에 들었다고 한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거의 매일이다.

이베트 지로는 그 후 두 번 더 한국공연을 가졌는데 60년대 중반과 70년대 초였다. 그 두 번의 공연 때 통역과 사회를 내가 맡았다. 이정도면 대단한 인연이 아닌가? 그러나 그뿐이 아니다. 의과대학 출신으로 극작가이며, 영화인이고, 체육인으로 활동을 하던 유한철 선생, 평생배우인 이해랑 선생, 무대미술계의 태두 김정환 선생, 그리고 이진섭 선생 등이 일주일에 한번, 아니, 거의 매일 만나서 문화계 전반에 걸친 문제에 대해 토론을 하는 모임이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맨 막내인 내가 꼭 참석을 했다. 신나기도 하고 걱정도 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이분들이 한결같이 주신(酒神) 급이라는 점이다.

어느 날 예의 그 자리에서 이진섭 선생이, "한철 형님, 우리가 이런 멋있는 모임을 갖다가 모두 다 세상을 떠나면 그땐 누가 이런 자리를 만들는지 걱정 되네요."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유起?선생은 일초도 틈을 주지 않고, "정홍택이가 있잖아. 걱정 마!"라고 말을 했다. 나는 지금도 이것이 부담된다. 그 분들처럼 멋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우정이란 무엇일까? Friendship? 친구끼리의 정? 그 정도로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을 이진섭 선생과 박인환 선생의 우정을 보면서 느낀다. 어려울 때 두 분은 서로 힘이 되어 부축했다. 그러다가 박인환 선생이 31세의 너무너무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자 이 선생은 박 선생의 관에 조니워커 두병을 넣어 주곤 "그토록 좋아 하던 거니 실컷 마시고 가라"며 대성통곡을 했다.

그러던 이진섭 선생도 1983년, 62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내가 빈소를 찾아 갔을 때 역시 언론계의 대 선배이고 사학자로 존경 받는 천관우 선생께서 안방에 앉아 소주를 들고 계셨다. 천 선생은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따라 나한테 주곤, "아까운 사람인데, 참말로 아까운 사람인데"라며 굵은 눈물을 흘렸다. 나도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생각을 했다. 이런 멋있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세상이 되려면 우리는 무슨 노력을 해야 할까? 세월이 갈수록 정말로 그리워지는 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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