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인 26일 오전 8시40분 수도권 광역전철 K693호가 지하 청량리역을 출발했다. 종착지는 충남 아산시 신창역. 서울시계를 지났는데도 좌석은 여전히 3분의 2쯤 차 있었다. 대부분 나이 지긋한 승객이었다.
경기도를 넘어 천안역에 다다르자 또 다른 노인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용산발 천안행 급행 전차를 탄 환승객이었다. 열차는 다시 만석(滿席)을 이뤘다.
노인들의 사랑방이 따로 없었다. 한 객실에선 각처에서 온 열댓 명이 귤을 나눠 먹으며 왁자한 방담을 나눴다. 할머니, 할아버지들 사이에 연락처가 오갔다. 다른 객실에선 후끈한 시국 토론이 오갔다.
이러구러 전철은 11시10분쯤 신창역 바로 앞, 온양온천역에 들어섰다. 약속이라도 한 듯, 노인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얼추 500명은 돼보이는 인파가 플랫폼을 가득 메웠다.
지난 15일 개통된 아산행 전철이 '실버 관광'의 새 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온천욕을 즐기려는 노인들로 붐비는 온양온천역이 그 메카다. 이일선 역무과장은 "장항선(천안~장항) 열차만 지날 때는 이용 승객이 30~40명 수준이었는데, 철로 복선화로 수도권 전철이 다니면서 하루 5,000명이 드나든다"며 "10명 중 7~8명은 고령자"라고 전했다.
역사 앞 관광안내소 직원 조원상(46)씨는 "원래 혼자 근무하던 곳인데 노인 관광객 폭증으로 아르바이트생 두 명이 투입됐다"고 말했다. 현재 천안역~신창역 연장구간엔 평일 왕복 114회, 토요일 70회, 휴일 62회로 전철이 운행되고 있다.
노인들은 보통 오전 10~11시에 도착, 온천욕과 점심 식사로 한나절을 보낸 뒤 오후 3~5시 다시 전철에 오른다. 4,000원 안팎의 입욕비, 5,000원쯤 하는 밥값에 전철 요금은 공짜이기 때문에 만 원짜리 한 장이면 충분하다.
지난해 천안역 개통 이후 노년층에 유행했던 '독립기념관 무료 관람→병천순대 점심→호두과자 간식' 코스의 인기를 능가할 기세다. 관광객 조승규(73)씨는 "소싯적만 해도 인기 신혼여행지였던 온양온천에 공짜 지하철을 타고 오니 감회가 새롭다"며 "둘러보고 좋으면 자주 놀러 올 생각"이라고 말했다.
낮 최고기온이 영하였던 이날, 노인들은 추위를 뚫고 온천탕과 식당으로 종종걸음 쳤다. 온천탕은 역사에서 도보로 5분 거리 내에 밀집해 있다. 외양은 여느 대중 목욕탕과 다를 바 없지만, 신경통ㆍ피부염ㆍ위장병 등에 효과를 낸다는 마니타온 성분이 함유된 온천수가 공급된다. "어르신 입장료를 1,000원 깎아드린다"며 호객에 나선 곳도 있었다.
오후 1시 한 온천탕에 들어가니 열 명 남짓한 노인들이 느긋이 목욕을 즐기고 있었다. 수원에서 온 70대 할아버지는 "1시간 반 거리니까 앞으론 동네 목욕탕 대신 여기 와야겠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신도림역에서 차를 탔다는 김일순(68)씨는 "어제 아파트 경비 근무 서느라 못 낸 성탄절 기분을 뜨뜻하게 내고 있다"며 "아내와 근처 민속박물관에 들렀다가 상경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온천탕 업주들은 희색이 돈다. 한 업소 관계자는 "평일 손님이 200명 정도였는데 요즘은 노인분들 위주로 손님이 20% 가량 늘었다"고 말했다. 여관방에 온천욕을 즐길 수 있도록 설비해 놓은 '가족탕'은 부부와 연인에게 인기다.
한 가족탕 운영자는 "평일에도 객실 20개 중 절반 이상이 꾸준히 나간다" 며 "다만 노인 고객들이 숙박까지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주변 식당가의 점심 장사 매출도 쏠쏠해졌다.
하지만 역 주변을 조금만 벗어나면 '지하철 특수'를 느끼기 어렵다. 인근 온양재래시장의 한 상인은 "재래시장엔 온천탕이 적은 데다 노인들이 돈을 많이 쓰는 것도 아니라서 매출엔 보탬이 안 된다"고 말했다.
한 시내버스 운전사는 "버스로 20분 거리에 현충사, 외암민속마을 등의 명소가 있지만, 노인들이 버스를 이용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고 전했다. 현충사 관계자도 "겨울이라 그런지 지하철 개통되고 나서도 노인 입장객이 특별히 늘진 않았다"고 말했다.
오전 온양온천역을 출발해 시내 관광 명소를 경유하는 시티투어 버스도 이용률이 극히 저조하다. 아산시 문화관광과 관계자는 "이용을 권해도 2만 원쯤 되는 비용이 비싸다며 물리치는 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노인들도 불만이다.
전호택(69)씨는 "온천욕 후에 꽃식물원에 가보려 했는데 안내 책자만 봐서는 가는 법을 잘 모르겠다"며 "시에서 노인 관광용 차량을 마련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후 3시가 넘어서자 노인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역사로 돌아왔다. 동료 교인들과 방금 온천욕을 마쳤다는 김인순(74)씨는 "몸 속 뭉친 곳들이 가뿐하게 풀린 기분"이라며 "내년엔 더 어렵다지만 아들이랑 손주들 일은 온천욕 하듯 잘 풀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추운 날씨라 김씨 일행의 얼굴엔 온천욕의 잔열?홍조로 떠올랐다.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동요 멜로디를 딴 경적을 울리며 서울행 전철이 들어섰다. 할머니들의 발그레한 웃음이 역사에 흩어졌다.
아산=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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