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12월 24일 아침.‘따르릉~’영화사 사무실로 집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빠, 지금 빨리 KBS TV 좀 켜 봐요.” 둘째 아들 준원이었다. 하던 일을 멈추고 TV를 켰다. 남녀 아나운서가 한 남자 어린이와 대담을 하고 있었다. 강원도 모 초등학교 3학년 어린이가 홀로 노 할머니를 모시고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그토록 힘든 사연을 웃으며 담담하게 말하는 어린이 앞에서 사회자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나 역시 그 어린이에 감동되어 넋을 잃었다. “보고 계시죠. 저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요.” 준원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는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 그 어린이의 수기를 구입하였다.
‘어린이 가장 김남석군’의 <혼자 도는 바람개비> . 글재주도 뛰어났다. 한 숨에 읽었다. 가슴이 찢어졌다. 즉각 김남석 어린이를 후원하는 ‘어린이재단’으로 다이얼을 돌렸다. 나는 이미 그 해 가족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이 작품을 영화화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있었다. 다행히 어린이 재단 김석산 회장님과 통화가 쉽게 되었다. 혼자>
“영화로 만들겠습니다.” 그도 쾌히 승낙하였다. 그 해 연말연시는 우리가족 모두가 이 이야기를 영화화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특히 둘째 초등학교 6학년생 준원과 첫째 중학교 3학년생 상원이 기획, 감독, 시나리오 작가가 되어 밤을 새워가며 신바람을 냈다.
영화제작 준비는 순조롭게 되었다. 이문웅 작가를 공동 집필자로 정하고 현지답사에 나섰다. 김남석군 가족은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남애리에 살고 있었다. 남애 해수욕장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동산 위, 자그마한 단칸 집. 한 할머니가 집 앞 조그마한 고추밭에서 일을 하다가 우리를 반가이 맞아 주었다. ‘김남석’ 어린이의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외아들 내외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두 손자를 키우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기력이 떨어져 더 이상 뒷바라지 할 수 없게 되면서는 큰 손자가 중학교를 중퇴하고 가장이 되었다. 그러나 큰 손자도 고생을 견디지 못하고 가출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초등학교 3학년생인 작은 손자 ‘남석’이 가장이 되었다. 남석은 형과 달리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밭일과 집안일을 돌보았다. 쇠약한 할머니를 모시고 읍 보건소 다니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남애 초등학교로 달려가 남석 어린이를 만났다. 남석은 ‘부모 있는 아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아니, 더 밝고 더 힘차 보였다. 학업성적도 뛰어났고 학급반장으로서 학우들의 리더였다. 남석은 시종일관 “당연한 일을 한다”고 말했다. 노 할머니 부양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며 ‘어린이 가장’으로서의 어려움보다 행복함을 이야기하여 주었다. 나는 그를 만나고 나서 이 영화기획을 정말 잘 했음을 재확인 할 수 있었다. 시나리오가 탈고 되었다.
나는 이 실화를 영화화하며 두 가지 문제를 풀고 싶었다. 첫째, 가출한 ‘남석의 형’이 집으로 돌아오게 하여야 한다는 것, 둘째는 실제 주인공이 사생활 공개로 피해를 받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1965년에 개봉되었던 실화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 의 실제 주인공 ‘이윤복’이 38세에 암으로 요절한 일이 있었다. 미망인은 남편이 <저 하늘에도 슬픔이> 의 실제 주인공이라는 낙인 때문에 평생 괴로워하며 살았다고 안타까워했었다. 저> 저>
나는 두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실화와 다르게 라스트 장면을 ‘형이 돌아와 가정이 행복해지는 것’으로 각색하고 주인공 이름도 ‘김남식’으로 바꾸었다. 영화의 주제는 ‘바람이 불지 않아도 내가 달리면 바람개비는 돌 수 있다’였다. 이 주제는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 손에 자란 나의 신념이기도 하였다.
영화는 곧 제작에 들어갔다. 할머니 역에 여운계씨를 캐스팅하고 주인공 ‘김남식’ 역을 공모하였다. 수원초등학교 4학년생인 ‘고정일’군이 1000대 1의 경쟁을 뚫고 뽑혔다.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2년간의 준비기간과 제작과정을 거쳐 마침내 영화가 완성되었다. 1991년 대종상은 이문웅 작가와 나에게 각색상을, 고정일 군에게 아역상을 시상하였다.
설날 국도극장 개봉이 결정되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청와대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다. 노태우 대통령 내외가 어린이 가장들과 영화를 만든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설날 청와대에서 함께 영화를 감상하고 오찬을 하자는 내용이었다. 춘추관을 개관하고 영화 상영을 하는 첫 케이스라는 것이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영화는 춘추관에서 상영되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영화를 보는 내내 울고 있었다. 곁에 앉아 있던 김옥숙 여사가 안타까워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그 이유를 곧 알게 되었다. 노 대통령은 다과를 하며 어린이 가장들에게 말하였다. “나도 어린이 가장이었다.” 榴?진심으로 어린이 가장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어 했다.
내게는 국가가 만들어야 할 영화를 개인이 만든 것에 대해 각별히 감사를 표하였다. 나는 국민이 국가요, 국가가 국민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잠시 멈칫하더니 자기는 영화가 개인 이익만을 위해 만들어지는 줄 알았다고 했다. 영화인에게 국가관을 기대해 본 적이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노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한국영화계를 위해 특별예산을 배정하여 종합촬영소 건립 및 진흥정책을 세우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이야기가 언론에 보도되자 그때까지 반체제감독으로 인식되고 있던 내가 한 순간에 어용감독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영화제작비 전액을 정부에서 지원받았다는 둥 흉흉한 소문이 떠돌았다. 사실무근한 영화계 소문에 나는 묵묵부답했다. 오히려 프린트를 50본 더 떠 전 세계 한국 대사관에 뿌렸다.
어린이 가장 돕기 운동을 독려하기 위해서 였다. 국도극장은 열띤 관중으로 연일 매진이었다. 극장 앞에 선 나에게 집을 나간 엄마가 돌아오게 하여달라고 호소하는 어린이도 있었다. 자식들을 버리고 간 며느리를 찾아달라고 내 손을 잡고 흐느끼는 할머니도 있었다. 그러던 중 드디어 어린이 재단으로부터 희소식이 날아왔다.
‘남석의 형이 영화를 보고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두 손을 들고 만세를 불렀다. 내가 어용감독으로 매도되든 나의 수많은 재산이 날아가든, 내가 만든 한 편의 영화가 한 어린이 가정에 행복을 찾게 했다면 그 어떤 아픔도 감당할 수 있었다.
새해 문턱에 서며 문득 그들 생각이 났다. 원고를 준비하며 어린이재단에 그들의 안부를 물었다. 할머니는 작고하셨고 남석의 형은 몇 년 전 사망하였다고 한다. 남석 군은 한국 굴지의 기업에서 잘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노태우 대통령, 김남석... 그 외에 수많은 어린이 가장들이 시대가 바뀌어도, 사회가 바뀌어도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 시간에도 고통을 이겨내면서 치열하게 살고 있는 어린이 가장들에게 축복의 나날이 있기를 기원한다. 집 나간 부모형제들이여, 이 추운 겨울에도 현관문을 열어 놓고, 전화벨 소리에 귀 세우고 당신들을 기다리는 어린이 가장들에게 즉시 돌아오기를 바란다.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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