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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빨래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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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빨래판

입력
2008.12.29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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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인

세탁기는 베란다에서 웅웅거리며 돌고 있는데

옷 껍데기들만의 혼음이

물살에 휘둘러지고 있는데

어머니, 돌아가시기 직전의 가슴마냥

욕실 한켠에 누워 있는

갈비뼈 한 짝, 저 가난에

내 속옷을 비벼 빨고 싶은 봄날이 있으니

새벽에 좌변기에 앉아

저 물맛도 오래 못 본 갈비뼈 위에

내 넓적다리 살이라도 덧붙여드리고 싶은데

가난은 가난해야 쓸모가 있다는 듯

갈비뼈는 더 갈비뼈답게 닳고 앙상해야

더 많이 때를 닳릴 수 있다는 듯

나무 골이 다 닳아 밋밋한 젖가슴처럼

세월의 자잘한 주름 골 다 평지로 만들어서야

아들아, 나는 해탈이 아니라 육탈이 즐거웠다

닳고닳은 뼈마디 부러지는 소리로

들판의 개뼈다귀와도 노시는 갈비뼈 한 짝의 어머니,

골골마다 당신이 주름잡은 곳 어디 저 빨래판뿐이겠습니까

가난한 어머니가 쓰시던 나무 빨래판이 세탁기에 밀려 욕실 한쪽에 누워 있다. 할 일을 잃고 누워 있는 빨래판의 골을 보니 이미 육탈하신 어머니의 갈비뼈가 생각난다. 빨래판은 세상에서 묻혀온 때를 씻겨주느라 어머니 젖가슴처럼 골이 닳을 대로 닳아 밋밋해졌다.

학창시절 철없던 나는 얼마나 박박 문질렀으면 옷에 빨래판 주름이 다 배겼겠느냐고 불평을 하곤 했는데, 이제 와 보니 어머니를 통해 바라본 세상이야말로 골골마다 수심 깊은 주름으로 만든 나무 빨래판이다. 주름 골 다 평지로 돌아가도록 비벼 빤 묵은 빨래들을 볕에 널어 걸던 어머니의 앙상한 갈비뼈 앞에서 울컥, 하는 순간이다.

손택수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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