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국회에는 의원들의 지정석이 없다. 그저 양쪽으로 늘어선 계단식 벤치가 있을 뿐이다. 국회의원이기도 한 총리는 소속 정당의 앞줄 가운데에 앉는다. 의장은 양측의 중간에 앉아서 토론을 주관한다. 양 진영의 벤치 사이에는 긴 테이블이 놓여 있는데 그 폭은 칼 두 자루의 길이와 같아서, 양 진영 사이에 벌어질지도 모를 불상사를 막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개탄스러운 국회의 '입법전쟁'
논쟁은 치열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발언이 나오면 야유가 터진다. 의장은 불편부당성과 소수자 보호라는 민주적 가치의 수호자로 기능한다. 여야의 논쟁은 의장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상대방을 직접 겨냥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마치 의장에게 상대방을 고자질하는 것 같은 모습이다.
우리 국회가 또 큰 사고를 쳤다. 촛불 시위에서 선을 보였던 분말소화기로도 모자라 전기톱이 등장했고, 국회의원들은 스스로 이 상황을 입법전쟁이라 부른단다. 이 상황을 주도한 여당 대표의 말은 영락없는 야전군 사령관의 명령이다. "전광석화처럼 착수해 질풍노도처럼 밀어붙이라." 세상에 법을 만드는 일이 전쟁이라니?!
주류 언론은 익숙한 양비론으로 눈에 보이는 현상을 개탄한다. 그리고 외친다. 당장 싸움을 멈추시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자신들의 당파적 입장에 사태를 꿰어 맞추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그 싸움이 무엇 때문에 시작되었고 그것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은 없다. 정책에 대한 토론과 타협에는 관심도 없이 모든 것을 이념의 잣대로 재단해서 편을 가르는 행태도 국회와 닮은 꼴이다.
교수신문이 선정 발표한 올해의 사자성어는 정확히 이런 세태를 꼬집는다. 호질기의(護疾忌醫)라는 이 말은 '병을 숨기면서 의원을 기피해 몸을 망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현대적 용어로 바꾸면 '병을 숨기고 진단도 하지 않고 남발하는 마구잡이 처방이 몸을 망친다.'이다. 제대로 된 검사를 통해 몸의 상태를 정확히 알아야 진단이 나온다. 일단 진단이 내려지면 그 병을 앓는 사람의 주변 상황을 고려해 바로 그 시기 바로 그 사람에게 적합한 처방이 내려진다.
그런데 저들은 진단도 없이 30년 전에 만들어 둔 처방전을 남발한다. 그 동안 엄청나게 발전한 의학을 공부할 생각도 없다. 환자는 이미 노년기에 접어들었는데 유년기에 쓰던 처방을 내놓는 것과도 같다. 그런 처방 중 하나가 "전 국토가 거대한 공사장처럼 느껴지게 해야 한다"이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도 모른 채 온 몸을 난도질하겠다는 것처럼 들린다.
병을 숨기는(護疾) 솜씨도 현란하다. 대운하를 공약으로 내세웠다가 총선에 불리할 것 같으니까 은근슬쩍 빼두는 센스도 있었고, 비밀리에 추진 팀을 꾸렸다가 촛불이 타오르자 국민이 원치 않으면 안 하겠다고 발을 빼기도 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4대강 정비라는 이름으로 부활하더니 이제는 아예 4대강 재탄생이란다. 속이 뻔히 보이는데도 절대로 대운하가 아니란다. 엑스레이만 찍어도 되는 진단을 미루는 격이다.
모든 걸 이념으로 재단해서야
진단을 피하는(忌醫) 솜씨도 수준급이다. 대통령의 형님이라는 분이 "인권위가 이 정부에서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느냐?"는 명언을 남겼다고 한다. 인권위는 의사가 아니지만 인권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건강을 나타내는 지표가 아닌가? 유엔에 북한의 인권 결의안을 제출한 것도 그들 아닌가? 그런데 정작 우리에게는 그것이 있어서는 안 될 존재라고?
사람을 얻지 못하면 나라를 구하지도 못한다. 제발 일관된 말과 행동, 그리고 국민을 섬기는 마음으로 '사람'을 얻으시기 바란다. 100분 토론에서 한 인기 개그맨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모든 것을 이념으로 재단하지 말고 '사람'에 투자해 주세요!" 혼자 사는 노인에게 연료비를 얼마나 보조해 줄 것인지를 두고 벌이던 영국 의회의 사람냄새 나는 토론의 모습이 그 위로 겹쳐진다.
강신익 인제대 의대 교수ㆍ 인문의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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