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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인생] 책, 그 무시무시한 주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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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인생] 책, 그 무시무시한 주술

입력
2008.12.29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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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 교수는 아직도 이렇게 책들을 들고 다녀야 하나? 가방은 어깨에 메었다고 해도 이 무게가 보통이 아닌데. 하나는 내가 들고 가지. 부친은 내 오른손에 들었던 책꾸러미를 빼앗다시피 하셨다. 먹을 것 많은 고모 집에 가겠다고 조르는 어린 나를 데리고, 새벽녘 광장시장으로 떠나는 변두리 승합차 정거장으로 향하시던 그 묵묵한 걸음을 옮기시면서.

답십리 집에 들르기 전 어느 출판사에서 구입했던 도록이며 고전주석서들을 묶은 비닐끈이 손가락을 잘라낼 듯 살을 파고들었다. 손수건을 꺼내 십자 매듭 부분을 감싼 뒤 책꾸러미를 오른손으로 옮겨 들고는, 부친의 그 익숙한 걸음을 뒤따랐다. 아직도 이렇게 많은 책을 봐야 하는 거냐? 눈이 피로하지 않게 자주 눈을 감고 쉬어라. 작은 차라도 하나 구입하지 그러느냐? 훌쩍 돌아다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기묘한 음색을 8월의 늦은 오후 공기 속에 흩어 보냈다.

베이징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하고 2주 동안 중국 여기저기를 여행하고 돌아와 부모님을 뵈러 갔던 날, 맥주라도 한 잔 하자고 하시는 부친의 말씀을 나는 듣지 않고 마을버스 정류장으로 굳이 향했다. 부친이 들어다 주신 책꾸러미를 받아들고 빈자리를 찾느라 평소와 달리 부친께 고개를 숙여 보이지 못했다.

가까스로 자리에 앉은 다음, 골목길을 터벅터벅 올라가시는 부친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이것이 부친의 마지막 뒷모습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일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불길한 단어는 배꼽 아래쪽에서부터 괴물처럼 가슴팍으로 밀려 올라왔다.

그리고 그날 밤 새벽 두 시, 친정에 다니러 와 있던 누이동생으로부터 부친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거짓이라고 꿈이라고 생각하면서, 대학병원의 영안실 침대에 누운 부친의 주름진 손을 움켜쥐고 뜻모를 기도를 하였다. 그러다가 문득 이것이야말로 책이 내린 무시무시한 주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2004년 8월 여름, 부친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부친의 마지막 뒷모습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은, 주쯔칭의 '아버지의 뒷모습'이란 단편이 남긴 잔상이 나의 뇌리 속에 똬리 틀고 나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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