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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 칼럼 멀리, 그리고 깊이] '시제(時制)'의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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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 칼럼 멀리, 그리고 깊이] '시제(時制)'의 상실

입력
2008.12.26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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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눕니다. 마치 끊어진 토막처럼 뚜렷하게 그 셋을 나누어 서술합니다. 이른바 문법의 시제(時制)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지금 그렇게 했었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어제 그렇게 했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내일 이렇게 하고 있다'고도 하지 못합니다. '내일 이렇게 할 거다'라고 해야 합니다. 시제가 일치하지 않으면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시간 경험은 이러합니다.

그런데 모든 인류가 시간을 이렇게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케냐의 종교학자 음비티(Mbiti)는 아프리카 종교와 철학을 서술하면서 자기들의 시간개념이 서양인들과 다르다는 것부터 풀어 나아갑니다. 스와힐리(Swahili)어인 사사(Sasa)와 자마니(Zamani)라는 용어로 과거, 현재, 미래로 나뉘지 않는 자기들의 독특한 시제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사사는 '곧 ~을 할 게다'라든지, '지금 ~을 하고 있다'든지, '막 ~을 끝냈다'든지 할 때의 동사시제를 일컫습니다. 우리 투로 말한다면 '곧'이라는 미래, '지금'이라는 현재, '막'이라는 과거가 다 섞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사를 현재나 과거나 미래의 어느 하나로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결국 그들에게는 우리가 과거라고 할 때나 미래라고 할 때, 또는 현재라고 할 때 느끼는 그러한 시간경험이 없습니다. 당연히 우리가 그들의 사사를 경험한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자마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사가 흘러 들어가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얼핏 과거라고 해야 할 듯해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되돌아가야 할 처음자리'라는 뜻에서 '지향해야 할 미래'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마니의 시제도 우리 경험으로 말한다면 과거와 미래가 겹친 것이어서 이에 상응하는 번역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들과 시간경험을 공유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인 애버리진(Aborigines)들에서도 나타납니다. 이를테면 아란다(Aranda)족은 이전에 일어난 어떤 일을 '알체링아(alcheringa)에 일어난 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표현대로 한다면 그것은 과거에 일어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시제가 과거는 아닙니다. '이미 일어난, 그러나 지금 여기에 있는 일'을 지칭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알체링아는 과거시제면서 현재시제입니다.

우리 사고방식으로 해석한다면 과거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것이 지금도 있고, 그래서 과거이면서 현재라는 뜻인데, 시제로 보면 혼란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게다가 그것이 곧 일어날 일을 담기도 한다는 것을 유념하면 시제의 혼란은 극에 이릅니다. 서양인들이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이러한 그들의 시간개념을 '꿈 시간(dream time)'이라고 명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이해할 법 합니다.

어쩌면 아프리카나 오스트레일리아의 시간개념은 유치하고 원시적인 것일지도 모릅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한데 뒤섞여 이를 분별할 수 없게 하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편견일지도 모릅니다. 실은 우리가 귀한 가치로 여기는 '역사의식'이란 따지고 보면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난 경험을 지금 여기에 두고 거울을 삼는 일,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지금 여기에 품고 뜸을 들여 이제까지와 다른 더 나은 삶을 빚어내도록 하는 마음가짐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데 아우르는 생각이지요.

우리가 잘 아는 온고지신(溫故知新)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식을 지니면 과거는 무의미하거나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기 있어 의미를 낳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도 미지의 것이거나 닿을 길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분명하게 그릴 수 있고 차근차근 현실화할 수 있는, 내 안에 있는 '현실'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의식도 아니고 미래의식도 아니며 현재의식도 아닙니다. 그 셋으로 나뉜 시제를 함께 아우르는 단일한 시제가 내 시간경험에서 일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역사의식'이 그대로 이 일을 감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때로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날을 해석해야 한다는 긴장된 의식을 넘어 자연스럽게 과거를 지금 여기에서 품을 줄 알아야 하고, 오지 않은 시간을 그려야 한다는 절박한 의지를 넘어 자연스럽게 미래를 안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본디 삶이기 때문입니다.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우리에게도 시간을 셋으로 나누는 분절된 개념이 아니라 그 모두를 한데 아우르는 사사나 알체링아 같은 그러한 '시제를 넘어선 다른 개념의 시제'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공연한 가슴앓이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러한 생각이 요즘 더 없이 절실해집니다. 세상 어느 때인들 성한 적이 있었겠습니까만, 모두 어려운 살림 애써 잘 견디려는데, 우리 사회 어디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그런데 오직 국회에서만 볼 수 있는, 아수라장을 보면서 더욱 그러해집니다.

그 '귀한 분'들이나 그들을 뽑은 우리에게 과연 과거라는 것이 있기나 한지, 미래라는 것이 있기나 한지, 그래서 정말이지 현재라는 것이 있기나 한지 되묻고 싶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개념은커녕 다만 세월은 흘러간다는 것, 내일은 바라지 않아도 온다는 것, 그 과정에서 나는 없었는데 있고 있는데 없어질 거라는 느낌만이라도 가지고 살아주면 고맙겠는데 그런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아무런 낌새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에게는 '시제'가 없습니다. '했었다'도 없고, '한다'도 없고, '하겠다'도 없습니다. 그 셋이 뒤섞여 모호한 채 그래도 상상력을 자극할 어떤 '동사'의 시제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없습니다. 시제가 명확해서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고 혼란스러워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아예 그런 논의 이전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현상'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짐승의 현상'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여기고 보면 우리의 사태가 겨우 읽혀집니다. 왜 이렇게 앞뒤 없이 난동을 하는지, 왜 이렇게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지, 왜 이렇게 모래알처럼 흩어져 사는지 환히 보입니다. 그러니 이보다 더 기막힌 일이 없습니다.

이제 곧 올해가 가고 새해가 옵니다. 뜯기는 달력처럼 그렇게 한 해가 사라질까 두렵습니다. 과거이면서 이제는 거울 되어 여전히 현재였으면 좋겠는데요. 새해가 그저 빡빡한 삼백 예순 다섯 개의 빈 칸으로만 내 앞에 펼쳐 있지 않은지 걱정스럽습니다. 그 여백들이 한 칸 한 칸 어제와 오늘을 담아 그 날에 이를 때마다 영롱한 빛을 발하는 미래이면서 현재였으면 좋겠는데요.

망언, 용서해 주십시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정진홍 이화여대 석좌교수 · 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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