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내가 머무른다. 참과 거짓의 강에서 내가 헤엄친다. 나와, 내가 아닌 것의 틈에 내가 존재한다…나는 있으면서, 없다."(14쪽)
염승숙(26)씨의 첫 소설집 <채플린, 채플린> (문학동네 발행)은 환상을 통해 자신이 처한 현실을 자각해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 환상이란 '어느날 아침 불안한 잠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벌레가 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카프카 식의 변신 서사가 주축을 이룬다. 채플린,>
염씨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갑자기 뱀의 꼬리를 가진 희한한 쥐가 돼버리는 물리치료사('뱀꼬리왕쥐'), 빚쟁이들을 피해 농염한 차림으로 달력의 풍경사진 속으로 들어가는 엄마('핀업걸'), 낯선 이가 다가와 "여봇씨요"라는 말과 함께 어깨를 툭툭 치자 콧수염이 매달리고 허리춤으로 바지가 올라간 채 화석이 돼버린 신용불량자('채플린, 채플린') 같은 이들이다.
"소소한 인물들의 절박함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기법을 찾다보니 환상적인 요소가 자주 들어갔다"는 것이 염씨의 말이다. 그의 작중인물들은 지리멸렬한 일상 속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잊고 살아가는, 집-직장-집을 오가는 소시민이기 일쑤다.
가령 "누구나 보았고 또 누구나 아는 주위의 풍경과 다른 점이 아무것도 없었다"거나 "둘레를 따라 새까맣게 때가 끼어 있는 흔한 살색 대일밴드 같았다"는 '수의 세계'의 주인공 공영에 대한 주변인들의 묘사는 직접적이다.
염씨는 그런 환상이라는 주춧돌 위에 '말놀이'라는 기둥을 쌓으며 소설을 만든다. "단어의 영역을 넓히는 것은 사건이나 시공간의 영역을 넓히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그의 소설은 그래서 오랜만에 펼쳐든 김소진의 소설들처럼, 감칠맛 나는 우리말 어휘들로 생동감이 넘친다.
'여자들이 순식간에 공영의 주위로 오도당오도당 몰려들었다'(59쪽), '눈에 보이는 모든 새들은 날렵하고도 재바르게 땅을 딛고 걸었다'(121쪽), '모철수씨는 그저 올가망해져 두터운 면발을 후루국거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157쪽)
등단 3년차로 동국대 국문과 대학원에 재학중인 염씨는 "사과가 땅에 떨어지면 뭐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파인애플이라고 한답니다"와 같은 농담을 즐기고, 화장실 유머집을 일부러 외우고 다니는 영락없는 '명랑소녀'다.
앞으로 식민지를 다룬 소설을 쓰고 싶다는 그. "제 소설이 좀 정신머리가 없기는 하지만 소설은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할 수 있다면 성석제, 박민규, 이기호 선배 같은 '웃음소설'의 계보를 이어가고 싶어요."
이왕구 기자
사진 김주영 인턴기자(고려대 언론학부 4) <저작권자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저작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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