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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2008] <2> 혜진이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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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2008] <2> 혜진이 가족

입력
2008.12.24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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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진아, 생일 축하해. 미역국이랑 밥 많이 먹어. 케이크도 먹고. 오빠, 언니는 학교 가느라 못 왔어. 다들 네 몫까지 잘 하겠다고 했어. 요즘 엄마, 아빠가 좀 힘든데 잘 지켜봐 줘. …혜진아, 거긴 따뜻하지?"

18일 오전 경기 의왕시의 안양시립 청계공원묘지. 봉분(封墳) 없는 딸의 묘 앞에 쪼그려 앉은 어머니 이달순(41)씨의 턱에 눈물이 하염없이 맺혔다 떨어졌다. 옆에 앉은 아버지 이창근(47)씨의 어깨도 가늘게 들먹였다.

살아 있다면 이날이 어여쁜 막내딸의 열 두 번째 생일. 맞벌이에 바빠 지난해 생일을 친구들끼리 보내게 한 일이 오래 마음을 후빌 것 같다. 쌀쌀한 날씨에 보온통에 담아온 생일 음식의 온기가 가시고도 한참 동안 부부는 일어서지 못했다.

부부는 지난해 성탄절에 딸을 잃었다. 이날 혜진이는 두 살 터울의 동네 친구 우예슬(당시 9세)양과 함께 외출한 뒤 종적을 감췄다. '안양 초등생 실종 사건'으로 불리며 세간의 걱정을 자아냈던 이 사건은 석 달 뒤 '안양 초등생 유괴ㆍ살해 사건'으로 재명명됐다.

실종 77일 만인 올해 3월11일 수원의 한 야산에서 혜진이의 찬 주검이 발견됐고, 닷새 뒤 이웃에 사는 독신 남성 정성현(39)이 유력한 용의자로 검거됐다. 같은 달 18일 그가 지목한 시흥의 한 하천에서 예슬이의 시신마저 발견되자 국민들은 분노했다.

처음엔 아이들이 차에 치여 숨졌다고 거짓말하던 범인은 경찰의 추궁에 범행을 실토했다. 술과 본드에 만취한 상태에서 길 가던 두 아이를 집으로 납치해 성추행 한 뒤 살해했고, 범행을 은폐하려 시신을 훼손해 내다버렸다는 것이다. 경찰은 수사 과정에서 범인이 2004년 군포에서 한 여성을 때려 숨지게 한 사실도 밝혀냈다.

이달순씨는 지난 6월 수원지법에서 열린 정성현의 재판에 갔다. "어떻게 생겼는지 똑똑히 보고 싶었어요. 피고인석 근처 방청석에 앉았는데, 자기 변호를 하는 모습이 어찌나 뻔뻔하던지…." 범인은 물론, 그 가족들도 딸의 죽음에 대해 사과 한마디 한 적 없다고 했다.

피고인측은 법정에서 "본드 흡입과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 상태에서 벌어진 범행"이라고 주장했지만 1, 2심 재판부는 "우발적 범행으로 보기 어렵다"며 사형을 선고했다.

지난 3월 혜진이를 이곳에 뉘었는데, 그새 묘가 많이 들어섰다. 납골묘라서 화장(火葬)한 유골을 묻고 평평히 다진 땅 위에 납작한 비석이 얹혀있다. 100기쯤 되는 주변 묘를 둘러보니 혜진이(1997년 12월18일생)가 제일 어리다.

혜진이보다 넉 달 먼저 태어난 한 남자 아이는 기일(忌日)이 같은 아버지 곁에 누워 있다. 혜진이의 마지막 길은 얼마나 쓸쓸했을까, 어머니는 또 울었다.

혜진이 묘엔 '못다 이룬 꿈 하늘나라에서 마음껏 펼치거라'라는 비명(碑銘)이 새겨져 있다. 혜진이의 꿈은 가수였다. "이효리도 좋아하고, 아무튼 가수라면 다 좋아했어요. 유치원 다닐 때부터 얼굴에 엄마 분(粉)을 뽀얗게 바르고 한복 꺼내 입고는 춤추고 노래하고…. 활달해서 친구도 많았어요."

이달순씨가 꺼내놓은 딸의 추억담을 듣는 이창근씨의 굳은 얼굴에 설핏 미소가 돈다.

두 아이를 키우며 꾸리던 어려운 살림이 조금 폈을 때 뒤늦게 얻은 딸이 혜진이었다. 다른 가족에게도 그렇지만, 특히 아버지에게 막내딸은 행복 그 자체였다. 오랜 맞벌이와 셋집살이를 끝내고 5년 전 지금의 집을 마련했을 때 제 방을 갖게 됐다고 기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런 딸을 잃고 아버지는 많이 말랐다. 끼니를 잘 안 챙기는데 술이 늘다 보니 165㎝쯤 되는 키에 몸무게가 50㎏ 언저리까지 빠졌다. 야구모자를 쓰는 습관도 생겼다. 가족들은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소리없이 흐느끼는 가장(家長)을 종종 본다.

몸이 아파 쉬겠다는 이창근씨를 집에 두고 이달순씨와 점심을 같이 했다. 마침 시험 날이라 동생 잠든 곳에 가보겠다며 일찍 귀가한 오빠(17)도 자리를 함께 했다. 이씨와 기자 사이에 슬그머니 반주(飯酒)가 오갔다.

딸 앞에서 눈물을 보일 때도 의연했던 이씨는 "혜진이한테 못해준 일이 너무 마음에 걸린다"며 여러 번 휴지를 눈가에 댔다. 그럴 때마다 아들은 "엄마답지 않게 왜 그래" 하면서 의젓하게 어머니의 어깨를 감쌌다.

딸을 잃고 충격에 빠졌던 이씨는 두 달 전부터 식당일을 다시 시작했다. 거절 못할 부탁을 받고 일주일쯤 주방일을 도우려던 것이 지난달 인쇄 기술자인 남편의 실직이 겹치면서 계속되고 있다.

사정도 모르고 식당 단골 중 한 명이 이씨 얼굴을 알아보고 "이제 식당엔 그만 나오는 게 좋지 않겠냐"고 훈계했단다. 그 속에 숨은 말과 몰이해가 가족들의 괴로움을 가중시킨다.

차라리 예슬이네처럼 멀리 떠나 살고 싶지만, 애써 가꿔온 삶의 터活?버릴 순 없다. 이씨는 진정될 만하면 상처를 들추는 언론에도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씨가 시계를 보더니 자리를 정리했다. 식당일 나갈 채비를 하는 것이다. 하루쯤 쉬어도 되지 않겠냐고 하자 "그럴 순 없다"고 잘라 말했다. 혜진이의 1주기인 이번 크리스마스엔 새 옷과 음식을 싸서 온 가족이 묘를 찾을 거라고 했다. 네 가족이 꿋꿋이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봐 달라고, 예쁜 옷 차려입은 막내딸에게 부탁하겠다고 했다.

안양=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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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진·예슬양 사건 발생 1년

아동 상대의 강력 범죄에 경각심을 일으킨 혜진ㆍ예슬양 사건 직후 당국은 앞다퉈 긴급 대책을 내놨다.

경찰은 지방청ㆍ경찰서에 아동 실종 사건을 도맡는 '실종수사 전담팀'을 설치했고, 국회는 성폭력범죄처벌법을 개정해 아동 대상 성범죄의 처벌 강도를 대폭 높였다. 하지만 어린이 실종자 수, 아동 상대 성범죄 건수 등이 개선되지 않아 대책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실종수사 전담팀은 1993년 이후 미제 사건 108건과 지난 3년간 신고된 1만9,000여 건, 4월 출범 이후 새로 접수된 실종 사건을 수사 대상으로 한다.

10월까지 착수 사건이 2만7,101건에 이를 만큼 방대한 업무지만, 전담팀 인원은 경찰서마다 3, 4명, 전국적으로 1,000명 남짓한 수준이다. 이런 가운데 올 상반기 아동 실종 건수는 4,857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2% 가량 늘었다.

일각에선 실종 전담팀의 인력뿐 아니라 전문성 문제를 짚기도 한다. '전국 미아ㆍ실종가족 찾기 시민의 모임' 나주봉 회장은 "실종 사건에 전문 지식이 없는 형사들로 전담팀이 급조됐다"고 지적한다. 지난 5월 대구 초등생 납치ㆍ살인사건만 해도 초동 수사가 미흡해 범인 검거에 실패했다는 것이 나 회장의 지적이다.

개정된 성폭력범죄처벌법은 13세 미만 여아를 강간한 경우의 법정형 하한을 징역 5년에서 7년으로 높이고, 살인까지 저질렀을 땐 사형이나 무기징역, 10년 이상의 징역으로 처벌하도록 했다.

여기에 아동 대상 성폭력범죄자에겐 출소 후 최장 10년간 위치추적 전자장치를 부착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전자발찌제'도 지난 9월부터 시행됐다.

하지만 이런 법적 규제는 '처벌이 강하면 범죄 억제력도 강해지나'란 근본적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여기에 지적 장애아를 7년 동안 성폭행해 온 친족들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일산 초등생 성폭행 미수범에게 "소아기호증으로 보이지 않는다"며 형량을 낮추는 등 국민 법 감정과 충돌하는 사법부의 최근 판결은 또 다른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훈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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