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근무지를 옮긴 이후 여러 가지 변화에 적응하기 바빴다. 무엇보다도 축소된 주거 및 직장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웠고, 강원도의 웅대한 자연환경을 벗하며 살다가 빽빽한 서울의 도시 공간 속을 헤쳐 다니기도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일상적으로 무언가가 나를 콤팩트 하게 쥐어짜거나 좁은 공간 속으로 자꾸만 밀어 넣는 듯했다.
게다가 좁은 집에서 다시 한집 살림을 하게 된 아내의 변화에 적응하기도 쉽지 않았다. 도통 등을 돌리고 자는 법이 없어서 한 여름 더울 때도 팔베개를 해야만 했던 사람인데, 등을 돌리지 않으면 이불을 둘둘 말아 벽을 세워놓고 잠을 잤다. 예사롭지 않은 변화라고 생각하여 “5년 만에 남남이 된 모양이지?” 슬쩍 물어보아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설거지도 거들어 가면서 다시 물어보았더니 “나 몰래 왜 통장을 만들었어?” 라고 힐문(詰問)부터 하였다. 몰래 만든 것은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필요성과 씀씀이를 설명해 주었지만 전혀 받아들이는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당신 외부에 글을 쓸 때, 나를 집사람이라고 하지 말고 아내로 써줘!” 라고 화제를 전환해 나갔다. “집사람이 뭐야 집사람이..., 내가 집만 지키는 똥개야? 다른 사람들한테 다 물어보아도 아내라고 하는 것이 맞대!” 라고 허공에 대고 퉁명스럽게 내질렀다. 말인 즉, 자기도 당당하게 활동을 하는 안주인인데 마치‘개념도 없는 집 지킴이’로 표현을 하여서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었다.
그제야 아내의 변화가 무엇인지 이해되었다. 나이도 나이려니와 ‘머리 쓰기는 이제 그만’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한국무용을 배우기 시작하더니 도처에 공연도 다니고 아이들한테 당당한 ‘한국무용가’로 인정을 받으면서 자의식도 많이 성장하였던 것으로 느껴졌다. 그랬기에 경제권이나 당당한 안주인으로서의 권위에 대한 도전은 용납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사실 그러한 경향은 이미 예전부터 보이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목소리가 젊은 시절보다 한 옥타브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자신은 나이가 들어 남성 호르몬이 많아져서 그렇다고 주장을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니 독립된 인격체로 당당히 설 자신이 생겼음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때로는 ‘황혼이혼’을 들먹이며 다림질과 설거지도 강요하였고, “아이들만 다 대학에 들어가면 다시 지방에 내려가도 따라 나서겠다”는 예전의 다짐도 벌써 잊은 듯했다. 오히려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어떻게 여자 애들만 서울에 두고 지방에 가서 살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데, 내심은 서울 친구들과의 재미있는 일들을 버려두고 따라 나서기 어려워서 였을 것이다.
이렇게 지방근무 5년은 나에게 적응하기 어려운 세월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노력과 끈기가 내포된 적응이라는 것에 매달려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지난 5년 세월이 만들어준 순응의 미덕을 살려나가려고 한다. 괜히 나를 주장하며 적응을 시도하다가 나를 괴롭히는 어리석음보다는, 순응함으로써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할 예정이다. 산은 산처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하며, 물은 물처럼 그저 흘러가게 해주려고 한다. 그래서 아내의 변화와 새롭게 변화된 가정 내의 위상에 맞추어 나가고자 한다. 먼저 통장부터 반납하고...
유병하 국립중앙박물관 전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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