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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크리스마스 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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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크리스마스 휴전

입력
2008.12.24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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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12월 24일. 그날도 벨기에 이프르에서는 영국군과 독일군이 전쟁을 하고 있었다. 죽음과 증오와 광기만이 번뜩이는 그곳에 눈이 내리자, 한 독일 병사가 눈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참,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지.” 그리고 그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부르기 시작했다.

캐럴은 점차 병사들의 합창으로 변해갔다. 병사들은 총을 내리고 참호에서 나와 서로 악수하고, 담배를 나눠 피고, 가족사진을 돌려보았다. 전사자들을 위한 합동장례식을 치르고, 축구를 했다. 그 순간만큼은 적도, 전쟁도 없었다.

▦훗날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말하는 이 크리스마스 휴전은 2005년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유럽 5개국(프랑스 영국 독일 벨기에 루마니아)합작의 <메리 크리스마스> (감독 크리스티앙 카리옹)로 국내에는 지난해 연말 개봉됐다.

앞서 2006년에는 EBS가 ‘지식채널e’에서 반전메시지로 이 이야기를 방영하기도 했다. 한 병사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그날의 기적과 감격을 편지에 적어 부모님에게 전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제가 그렇게도 죽이려고 애썼던 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악수를 했다는 사실을…”

▦한번 뿐이었다. 양측 사령부는 오히려 화를 냈다. 군기가 해이해졌다며 전선에서 적과의 접촉이나 평화 행위 일체를 금지했다. 크리스마스 때만이라도 전투를 중단하자는 로마교황청의 호소도 소용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캐럴 합창 소식은 모든 전선으로 퍼져 나가 전투 중간에 서로 전사자들을 수습하는 ‘장례 축제’가 유행하기도 했다.

할머니 혼자 사는 독일 산골 외딴집에 부상을 입고 찾아온 미군 5명과 추위를 피해 들어온 독일군 4명의 또 다른 ‘크리스마스 휴전’ 이야기도 들렸다. 이프르에는 그 날의 ‘휴전’을 기념하는 큰 십자가가 세워졌다.

▦지금 그리스에서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수난을 당하고 있다. 15세 소년이 경찰이 쏜 총에 숨진 것에 항의하는 시위대들이 아테네 산티그마 광장에 정부가 세워 놓은 트리를 불 태우고, 오물을 던졌다. 그리스는 평화를 말할 자격이 없는 땅이라는 것이다.

한미FTA 법안 상정을 둘러싸고 물대포, 망치, 소화기로 전투를 벌여 세계 언론에까지 망신당한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여당이 대화와 타협의 ‘크리스마스 휴전’ 을 들고 나왔다. 물론 야당은 거부하고 법안 강행처리에 필사 항쟁하겠다는 각오다. 정치를 전쟁으로, 상대를 불구대천의 원수로만 여기는 곳에서 ‘기적’을 바랄 순 없다.

이대현 논설위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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