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위기의 기폭제가 된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가 파산 보호 신청을 한 지 3개월여. '제2의 외환 위기' 가능성까지 제기됐던 극심한 '달러 기근' 현상이 이제 최악의 고비는 넘겼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여전히 위험 요인이 산적해 있지만, "적어도 외화 유동성 위기가 더 악화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평가가 우세하다.
하지만 지금 한국 경제는 '원화 기근'이라는 또 다른 악재에 직면해 있다. 돈을 풀어도 풀어도 실물(기업, 가계)로까지 돈이 흘러 들어가지 않는 극심한 자금 경색이다. 이 같은 원화 기근 현상이 지속된다면 한계선상에 있는 기업과 가계들은 줄줄이 파산할 수밖에 없다. 외화 및 원화 자금시장 상황을 짚어봤다.
그나마 개선 기미가 보이는 외화 사정과 달리 원화쪽 자금경색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찍어낸 돈이 왕창 풀리기는 했지만 돌지 않기 때문이다.
건전성 악화를 우려하는 은행들은 갑자기 불어난 단기자금을 대출 등에 쓰지 않고 중앙은행으로만 되돌리고 있고 정작 돈이 급한 기업과 개인들은 여전히 아우성이다. 극심한 자금경색은 연말이 지나면 다소 풀리겠지만 근본적 해결은 경기가 되살아 나야 가능할 전망이다.
이 달 초 본보는 12조원의 유동성 공급분이 실물경제(기업)으로 흘러들어가지 않고 은행들과 한국은행 사이에서만 '핑퐁' 중이라고 보도했다.(12월5일자 6면) 그 후 보름여 동안 한은이 기준금리를 1%포인트나 더 내리고 8조원의 유동성을 더 풀었지만 사정은 은행들의 단기 여유자금 액수만 늘어났을 뿐 그대로다.
지난주(18일) 시중은행들은 한은의 정례 환매조건부채권(RP) 매각에 무려 41조원 어치를 사겠다고 신청했다. 겨우 기준금리(3%) 만큼의 이자를 쳐주는 일주일 만기 채권에 40조원 이상을 맡기려 할 만큼 남는 돈이 많다는 뜻이다.
한은이 이 가운데 13조원 어치만 사주고 나머지는 돌려보냈으나 은행들은 이 가운데 상당액을 다시 2%(기준금리-1%포인트) 이자의 한은 자금조정예금에 예치했다.
금융권은 현재 5조원 이상이 자금조정예금에 들어 있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결국 은행들이 단기 여유자금의 절반 가량은 한은에 맡겨 둔 셈. 나머지 역시 대부분은 콜시장 같은 초단기 자금시장에서 굴리고 있다.
지난주 말 현재 2.8%대인 콜금리 역시 기준금리 아래인 점을 감안하면 은행들은 요즘 기준금리에도 못 미치는 이자 수준을 감수하면서도 돈을 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은행들이 돈을 쥐고 있으니 기업들은 죽을 맛이다. 지난달 예금은행들의 기업대출 증가액(3조5,000억원)은 10월(7조3,000억원)의 절반 수준으로 올 들어 가장 적었다. 단기자금은 많아졌지만 기업들에 대출은 안 해줬다는 얘기다.
대출이 막힌 기업들은 회사채 발행에 몰리고 있다. 지난달 기업들이 회사채 공모발행을 통해 조달한 자금(3조5,162억원)은 10월(2조2,539억원)보다 50% 이상 급증했다.
하지만 금리가 너무 높다. 기준금리는 10월 이후 2.25%포인트나 떨어졌는데 3년 만기 회사채(AA-등급) 금리는 10월초 7.87%에서 지난주 말(19일) 현재 되려 7.98%로 올랐다. 기업어음(CPㆍ91일물) 금리도 6.72%에서 6.79%로 상승했다.
최근 들어 은행들은 개인들에 대한 대출도 잠정 중단한 상태다. 연말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과 유동성비율 등을 맞추기 위해 1억원 이상 대출은 "웬만하면 다음달에 하시라"는 분위기다.
꽁꽁 언 자금경색은 언제쯤 풀릴까. LG경제연구원 정성태 선임연구원은 "은행들이 연말 BIS비율 등을 맞추기 위해 더욱 몸을 사리고 있고 기업 대출 활성화에 도움을 줄 보증확대 역시 정부예산이 집행되는 내년부터나 가능해 당분간 극심한 경색현상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며 "연말이 지나면 다소 나아지겠지만 근본적인 사태 해결은 경기가 나아질 것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고 전망했다.
김용식 기자 jawohl@hk.co.kr
● 달러 유동성 한숨 돌렸지만…4월 韓美 통화 스와프 연장 등 고비로
요즘 외환시장과 외화자금시장은 한 바탕 전쟁 후 평온을 되찾은 모습이다. 적어도 금방이라도 환란으로 치달을 것 같은 공포감이 만연했던 1, 2개월 전과 비교하면 그렇다. 이젠 비관론자조차도 "달러 유동성 위기는 최악을 넘긴 것 같다"고 평가를 내린다.
■ 지표 대폭 개선
환율은 11월말을 정점으로 급속히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불과 한 달 전(11월21일) 장 중 1,525원까지 치솟았던 원ㆍ달러 환율은 1,300원 수준까지 추락했다. 낙폭이 15%가 넘는다.여전히 하루 변동폭이 크기는 하지만, 달러당 50원 이상 급등락을 했던 때와는 비할 바가 아니다.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 신용부도스와프(CDS) 가산금리도 절반 수준으로 낮아졌다. 10월말 699bp(100bp=1%)까지 치솟았던 5년 만기 외평채 CDS 가산금리는 최근 350bp 안팎에서 움직이고 있다.
CDS 가산금리가 높다는 것은 해외에서 우리나라의 국가부도위험이 높다고 평가를 한다는 의미. 9월 중순 정부의 외평채 발행이 무산된 것도 국제금융시장 경색으로 CDS 가산금리가 급등한 데 따른 것임을 감안하면, 내년 정부의 외평채 발행도 한결 수월해질 전망이다.
■ 최악은 넘겼다
정부의 달러 물량 공세와 시장 참가자들의 심리적 안정이 맞물리면서 극심한 패닉(공포) 현상이 재연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지금까지 정부와 한국은행이 시중에 쏟아 부은 달러는 한ㆍ미 통화 스와프 자금까지 포함해 430억달러 가량. 외환보유액(2,000억달러 수준)의 5분의 1이 넘는 규모다.
여기에 미국에 이어 일본, 중국과의 통화 스와프가 체결되면서 '최후의 안전판'이 마련됐고, 경상수지 흑자 전환, 외국인 주식 순매수 전환 등도 달러 기근 해소나 환율 하락에 기여했다는 평가다.
현석원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외화 여유분이 확보되면서 위기 재발 우려는 현저히 낮아졌다"고 말했다. 심지어 위기 경고를 수차례 해왔던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도 "이젠 미국 내 대형 금융기관 붕괴 등의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외화 유동성 위기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물론, 국내 외화 사정이 급속히 개선되길 기대하긴 힘들다. 최소한 내년 상반기까지는 단기적인 충격이 되풀이될 가능성이 많다는 지적이다.
장재철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과도한 은행권 단기 외화 차입 문제나 4월말 만료되는 한ㆍ미 통화 스와프 연장 문제 등은 강력한 외부 충격에 취약한 요인일 수밖에 없다"며 "점차 상황이 좋아지긴 하겠지만 급속한 개선을 기대하기 힘든 만큼 추가 악재에 대한 사전 대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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