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22년 전에 하늘이 주셨던 선물이 생각난다. 1986년, 내가 <플래툰> 계약서를 손에 쥐고 ‘ORION’사 문을 열고 나온 시각은 12월 19일 오후 5시 30분이었다. 단 30분 만에 계약을 성사시킨 것이다. 뉴욕 맨하탄 거리는 선물꾸러기를 든 크리스마스 축제 인파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플래툰>
아기예수의 탄생을 기뻐하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선물을 주고받으려는 그 행렬 속에 나도 당당하게 끼어 있었다. 흥행참패로 식구들 얼굴 보기가 부끄러워 연말을 홀로 지내겠다고 보따리를 싼 나였다. 그런데 닷새 만에 다시 ‘종이 한 장’을 달랑 들고 ‘성탄선물’이라며 집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이다.
이 선물꾸러미가 나의 인생에 또 하나의 ‘독’이 될지, ‘약’이 될지 그 누구도 알지 못 했다. 서울에 도착하는 사이 <플래툰> 은 벌써 대형 사고를 내고 있었다. 미국주재 외신기자가 주는 ‘골든 글로브 상’에 작품상, 감독상을 비롯하여 무려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된 것이다. 플래툰>
뉴욕과 LA 2개 영화관에서 개봉한 영화가 단 5일 만에 미국 전역에 무려 800개 극장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외신에 놀란 충무로 외화 수입업자들이 부랴부랴 전화통을 붙들었고, 뉴욕 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러나 전화기에서는 연말연초의 긴 휴일이라는 녹음만 흘러나왔고 영화사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플래툰> 의 흥행기록은 순식간에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세계영화수입업자들은 영화사 직원을 만나기 위해 무조건 뉴욕으로 날아갔다. 순식간에 고가의 맨하탄 호텔방들이 세계영화 장사꾼들로 만원이 되었다. <플래툰> 은 개봉 전, 전 세계 한 지역에도 팔지 못하고 있었다. 새해 아침, ‘ORION’사 문이 열렸다. 값은 이미 하늘을 치솟았다. 플래툰> 플래툰>
횡재를 꿈꾸며 달려간 수 십 명의 한국수입업자들이 풀이 죽어 영화사문을 나섰다. 그들이 들은 건 ‘이미 팔렸다.’는 한 마디였다. 외신은 다시 <플래툰> 이 ‘아카데미상’ 작품상, 감독상 등 8개 부문 후보가 되었다는 소식을 타전했다. 극장업자와 배급업자들은 혈안이 되어 판권을 구입한 회사를 찾기 시작하였다. 중간 배급권이라도 사고 싶었던 것이다. 플래툰>
그러나 판권 소유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플래툰> 은 결국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를 휩쓸었다. ‘ORION’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전세계영화시장이 철저하게 외면했던 이 영화를 ‘유일하게 한국의 한 영화감독이 구매하였었다’며 나의 이름을 거명하였다. 집과 회사 전화가 불이 나기 시작했다. 조마조마해하던 아내가 물었다. “진짜 사고 난 거야?” 내가 한참 있다가 그녀에게 답했다. “음… 앞으로 험한 산을 수 없이 넘어야, 사고를 내지.” 플래툰>
월남전을 배경으로 한 <플래툰> 은 철저한 반전영화였다. 또한 ‘하극상’이 매우 강한 영화였다. 즉, 영화검열이 불가능한 영화였다. 귀신같이 정보가 빠른 수입업자들이 손을 안 댄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러나 나는 ‘한번 붙어보자’는 속셈이 있었다. 다행히 그 영화가 ‘세계적 대형사고’를 내며 나를 돕고 있었다. 플래툰>
삼성은 역시 뛰어났다. 이병철 회장, 이건희 부회장 체제 때였다. 이회장 가족은 호암아트홀을 한국최고의 문화공간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나의 첫 수입영화 <오델로> 를 이부회장은 비서실을 통해 호암아트홀에서 개봉하자고 제의한 적이 있었다. 내가 영화계 선배인 S씨와의 구두계약으로 호암아트홀 직원의 제안을 거절하자 직접 나섰던 것이다. 오델로>
그는 나의 신의를 지키는 처신을 높이 산다는 의미로 차기 수입영화를 무조건 여름프로로 결정한다는 계약서를 만들어 보냈던 것이다. 호암아트홀 책임자가 신나서 제일 먼저 달려왔다. ‘수입불가’라며 방해공작을 하는 영화계의 거물 3악동이 만든 악성 루머로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였다.
대뜸 전도금 2억원을 주고 돌아갔다. 땡전 한 푼 없이 눈동자만 굴리고 있던 내가 벌떡 일어났다. <태> 검열시비로 한판 붙었던 공윤위원장 여성 아동문학가 L씨가 전두환 정부에 충성심을 보이고 싶었는지 나를 한방에 보내겠다며 수입 추천심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심의 날을 월남패망 날인 4월 30일에 맞췄다. 태>
그리고 ‘고도의’ 작전에 들어갔다. 양대 TV아침뉴스시간에 <플래툰> 예고편과 심의에 문제 될 장면을 약 20분간 방영, 금년도 아카데미 수상작을 빨리 보고 싶어 하는 시민들의 인터뷰, 월남패망을 상기시키는 건전한 예술영화로 홍보, 조간신문 문화면에 월남패망과 영화 <플래툰> 으로 완전 도배…. 우리 국민이 이 영화를 못 보게 되면 사회적 문제가 되도록 완전 포위를 했다. 플래툰> 플래툰>
검열일. 회의실 앞에서 입장하고 있는 검열위원들의 표정을 읽었다. 작전은 적중한 것 같았다. 검열위원들이 전에 비해 부드러운 얼굴로 내 앞을 지나갔다. 휴식시간 중 중앙정보부직원과 보안사령부직원이 내 눈치를 보며 지나갔다. 나는 통과된 것을 알았다. 충무로가 뒤집어졌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해 한국 여름극장가는 <플래툰> 이 휩쓸 것이라는 것은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남은 일은 등급. 하극상 장면과 베트남 난민 살생 장면을 다 잘라버리면 속없는 강정으로 흥행에서 참패하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검열관들 작전이 그것이었다. 본 검열 일은 6월 29일. 그 전날 밤, 신문사 정치부 데스크에 있는 친구가 내일, 엄청난 일이 벌어지리라고 귀띔을 해주었다. 플래툰>
6월 29일 아침. 민정당 노태우 대표가 ‘6ㆍ29선언’을 한 것이다. 거리에 시민들의 환호의 물결이 넘쳤다. 검열관들이 두 손에 들고 있던 가위를 내던지고 줄행랑을 쳤다. 무삭제, 12세 입장 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때 뚜껑을 열자!> 급히 5일 후로 개봉을 정했다. 이>
이병철 회장실에서 지시가 떨어졌다. ‘호암아트홀 로비에 스낵라운지를 설치하라.’ 나는 솔직히 그렇게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리라고 예측하지 못했는데 이병철 회장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국내 인테리어회사가 짧은 기일 문제로 난색을 표하자 일본회사를 불렀다. 사람들이 돈을 주고 가겠다고 오는데 왜 그대로 돌아가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7월 4일 아침 오전 5시, 호암아트홀 앞에서부터 시작한 줄은 시청 앞까지 늘어섰다. 암표상들은 극장 앞에 나타난 나를 반갑게 맞아줬다. 매번 고개를 떨어뜨리고 극장 문을 나서는 나에게 용기를 주던 그들이었다. 서울 장안의 모든 암표상이 호암아트홀과 국도극장 앞으로 몰려들었다. 암표상을 쫓는 경찰관에게 말했다. “대강대강 하세요. 오래간만인데.” 3,500원짜리 티켓이 1만5,000원을 호가했다.
나는 웃으며 암표 아주머니들에게 아들 학원비 정도만 벌라고 말했다. 영화는 60일간 서울 호암아트홀과 국도극장에서 완전매진의 진기록을 만들었다. 그 해 여름 <플래툰> 은 전국을 강타했다. 그리고 나의 빚더미를 한 방에 쓰나미처럼 날려버렸다. 금년 크리스마스에는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나에게 어떤 선물을 주실까, 진심으로 기다려진다. 플래툰>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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