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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아내의 못생긴 방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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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아내의 못생긴 방한화

입력
2008.12.22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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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가 되고 처음으로 연구년을 맞아 우리 가족은 이번 겨울을 미국 보스톤 지역에서 지내고 있다. 보스톤의 위도는 중국 만주지역과 비슷하다. 그런 만큼 겨울 날씨가 춥고 눈이 많이 내린다. 예전에 보스톤에서 학생으로 생활했던 나는 이 곳 겨울 추위의 매서움을 잘 알고 있지만, 아내는 처음으로 경험하게 된다.

● 운동화 고집한 신념

보스톤 사람들이 겨울이면 한결같이 신고 다니는 방한화가 있다. 군화처럼 목이 긴 방한화인데, 방수처리가 되어 있고 바닥도 등산화처럼 미끄러지지 않도록 만들었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크고 볼품 없는 모양을 갖게 된다. 한달 전 아내를 신발 가게로 데리고 가서 이 방한화를 보여 주었다. 아내의 반응은 너무 못생긴데다, 한해 겨울만 나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처지에서 굳이 사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가져 온 운동화가 있으니 눈이 오면 어떻게 그것을 신고 다니면 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였다.

서울에서만 살던 아내로서는 눈이 30~40cm나 쌓인 길을 운동화를 신고 걸으면 어떻게 되는지 상상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보통 운동화를 신고 눈 속을 다니면 발이 젖어 동상에 걸리고 미끄러운 곳에서는 넘어지게 된다고 차근차근 설명을 해 주었다. 워낙 남편 위상이 실추된 처지인지라 아내가 믿지 않을까 두려워 점원들에게도 물어보도록 했다. 그들은 당연히 두터운 방한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런데도 아내를 설득해 방한화를 사기까지 며칠동안 여러 차례 신발가게를 들락거려야 했다.

나는 보스톤의 겨울을 여러 해 경험한 ‘전문적 지식’이 있고, 아내에게 못생긴 방한화를 신겨 굳이 망신을 줄 이유가 없으므로 사실 아내는 나의 조언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방한화를 사려하지 않은 것은 눈이 아무리 많이 와도 운동화로 충분하다는, 아무런 근거 없는 자신만의 신념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 아내뿐 아니라 연구년을 맞아 이 곳에 오신 다른 교수 분들이 주변의 거듭된 조언에도 불구하고 운동화로 어떻게 버텨보겠다고 방한화를 사지 않은 것을 알고 조금 놀랐다.

살아가면서 남을 설득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느끼게 될 경우가 많다. 아무리 객관적 자료를 제시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여도, 많은 사람들이 듣는 척만하고 원래 자신이 원하던 대로 행동한다. 심지어 유학 상담을 청한 학생을 붙잡고 한 시간 동안 조언을 해 주었는데 나중에 내 조언과 반대로 행동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래서 이유를 물으면 외국도 가 본 적이 없는 선배의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 학생은 나를 찾아오기 전에 이미 자기가 어떻게 유학을 가고 싶은지 마음을 정한 상태였고, 나는 그야말로 소 귀에 경을 읽은 격이다.

젊은 시절, 어떤 문제에 부딪쳐 무엇이 올바른 결정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 경우가 많아 혼자 고민한 적이 있다. 그런데 요즘은 문제를 듣자마자 이미 누가 옳고 누가 그르며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고 순간적으로 확신을 하게 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심지어 나중에 내 판단이 틀린 것으로 드러나는 경우에도, 내가 잘못 판단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상황이 바뀌었다거나 누가 내게 올바른 정보를 주지 않았다거나 운이 없었다고 정당화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느낀다.

● 모두가 고정관념 버리길

이렇게 흔들리지 않고, 설득할 수 없는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들이 나 말고도 우리 사회에 점차 늘어가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은 무조건 잘못 되었고, 내 주장은 반드시 옳다는 투철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닌지, 한 해를 보내면서 곰곰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새해에는 남을 잘 설득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남에게 쉽게 설득되는 사람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다행히 오늘 폭설이 내려 아내가 방한화를 잘 샀다고 좋아하고 있다.

한순구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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