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타! 지각이야!" 매일 아침의 소동, 6살 쌍둥이 아들들을 유치원에 데려다 주려 젖은 머리 휘날리며 벌어는 일입니다. 아들들은 차에 타자마자 길거리 간판들을 보고 시작합니다. "'아기'할 때 '아'다. … 엄마, '태극기'할 때 '기'지?" "엄마한테 자꾸 말 시키면 저번처럼 사고 나." 그렇지만 채 5분도 지나지않아 또 조잘조잘댑니다. 아들들은 얼마 전부터 배우기 시작한 한글에 호기심이 가득합니다. 흐뭇합니다. "재미있게 놀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과 사이 좋게 놀다 와."
저는 강원도에 사는 경상도 여자랍니다. 대견한 딸 둘에 장난으로 똘똘 뭉친 아들 둘을 둔 삼십대 후반의 예쁜(호호호) 정육점 아줌마입니다. 저는 이렇게 매일 아침을 시작합니다. 아이들을 학교랑 유치원 보내고 9시30분쯤 정육점에 출근을 합니다. 시아버지께서 깔끔하게 미리 정리해 놓고 기다리시다가 아침식사 하시러 집으로 가십니다. 간단하게 진열을 끝내고 준비를 마치면 2시간 정도 혼자 생각하고 취미생활하는 시간이 됩니다.
오후 1시가 넘으면 야무지고 차분한 일학년 둘째 딸이 인사하며 들어옵니다. 간식 먹으면서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합니다. 생활자체가 질서 정연한 아이라 군소리 없이 제 할 일을 합니다. 3시가 넘으면 5학년인 큰딸이 들어서면서 역시 학교에 있었던 일을 죽 늘어놓습니다. 그리곤 간단하게 간식을 먹고 학원엘 갑니다. 딸들이 다시 떠나고 나면 이제 바빠집니다. 손님들이 장보러 나오는 시간이니까요. 정신없이 줄선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나면 개구장이 아들들이 "엄마~"하면서 옵니다. 6시30분쯤에 저녁을 먹습니다. 식탁에 앉아 서로 비좁다고 밀치면서 경쟁적으로 4명의 아이들이 맛있게 먹습니다.
그리고 나면 여동생이 와서 아이들을 챙겨 갑니다. 7시30분이면 몰리던 손님도 거의 끝나서 어질러진 가게를 혼자 정리합니다. 이것저것 체크하고 정리하다 보면 밤 10시가 됩니다. 아이들을 데리러 동생 집에 가면 아이들은 다들 소리치고 깡충깡충 뜁니다. "그래, 엄마다!" 너무 행복합니다.
요즘 사춘기를 시작한 큰 딸 때문에 조심스럽긴 해요. '혹 엄마가 정육점 한다고 기죽지는 않나? 왕따는 아닐까? 엄마직업에 대해 창피해 하지는 않을까?' 가게가 있는 곳은 시내에서 제일 부촌에 위치해 있어요. 전문직에 계신 분들이 많아서 방학이 되면 단기 어학연수를 떠나는 아이들이 많지요. 그런 분위기 때문에 딸애가 봄에 갈등하는 것을 보고 저도 혼돈스러웠어요.
10년 전 IMF시절에 제가 다니던 식품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소속해 있던 연구소 개발과 직원 대부분이 구조조정을 당했어요. 사내 결혼한 저는 그때 만삭이라 다른 여지가 없었어요. 큰딸을 낳고 재취업에 나섰지만 힘들었고, 작은 도시의 대학교를 졸업한지라 더더욱 어려웠어요. 그래서 이왕 이렇게 된 거 돈이라도 많이 벌자 해서 이웃 어른들께 여쭈어보았더니 정육점을 말씀하시더라구요. 음식솜씨 없으니 식당도 그렇고, 말주변 없으니 영업직은 더 어렵고…, 그렇게 시작한 게 정육점입니다.
친정아버지께 말씀 드렸더니 "백정이 되려느냐?"고 화를 벌컥 내시며 전화를 끊으셨지요. 곱게 키워 시집 보냈더니 험한 일 한다고 마음이 상하신 거지요. 그렇게 29살에 시작했는데 그래도 젊은 여자가 힘든 일 한다고 주변 정육점 분들께서 많이 도와주셨어요. 그 분들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처음 하는 일이라 속일 줄도 모르고 그저 양심껏 했어요.
처음에는 손해도 많이 봤지만 얼추 10년이 지난 지금은 단골도 생기고 많이 안정됐어요. 시작할 때는 주변 분들이 '젊은 여자가 살려고 애쓴다'고 잘 봐주셨고, 지금은 '아이들 4명이나 데리고 한다'고 예뻐 하십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은근히 느껴지는 뭔가가 있어요. 손님때문에 느끼는 자존심 상함, 그들의 여유에 대한 부러움 대문에 "예전엔 저도 그런 사람이었다"고 떠벌릴 때도 많았어요.
한번은 큰딸이 심한 경기를 않았는데 '엄마가 피를 보는 직업이라서 그런 일을 겪나?'해서 마음이 아팠어요. 갓 태어난 쌍둥이는 폐렴으로 병원에 계속 다녔어요. 냉장고의 냉기 때문이었던가 봐요. 그래서 정육점을 탈출하려 오전 한가한 시간에 미용학원을 다녀 자격증을 딴 뒤 미용실에 다니는 등 다른 직업들을 겸업해보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미용실은 성격이랑 안 맞고 애들 데리고 하기도 그렇더군요. 또 다른 직업은 저녁 퇴근 때까지 아이들이 너무 힘들어 했어요. 2년 반 정도의 외도를 접고 다시 정육점을 시작한지 1년 반이 됐습니다. 지금은 아이들이 다들 건강하고 잘합니다. 아이들 간식도 챙겨줄 수 있고, 얘기 들어줄 수도 있고, 또 제가 하고 싶은 간단한 취미생활 할 수 있는 정육점이 제겐 천직인 것 같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고기가 들어오면 지나가던 아이들이 "아유, 징그러워"라고 합니다. 그땐 큰 아이를 봅니다. 한창 예민한 시기거든요. 손님들께서 칭찬으로 하는 "예쁘구나" "공부 잘하는구나"하는 칭찬도 간섭이라고 생각할 정도지요. 그래도 큰딸은 장래희망 난에 제가 미용실할 때는 '미용사'라고 썼고, 정육점하는 지금은 '정육점'이라고 적습니다. 이 정도면 착한 편이죠? 남편은 퇴근해서 아이들이 없으면 뻔히 알면서도 여러 번 되풀이해서 묻습니다. "애들은?"
행복이 요란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시집올 때 "고생만 시키다 시집 보낸다"고 눈물 보이시던 친정엄마께 "엄마처럼만 살면 누구보다도 잘 살수 있어요"라고 말씀 드린 적이 있어요. 큰딸에게도 얘기해주고 싶어요. 무엇이든 열심히만 하면 만족한 삶을 살 수 있다고요. 정육점이 주는 행복에 너무 감사합니다.
강원 원주시 명륜동 - 하금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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