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전인 1938년. 보통인부의 평균 일급은 92전이었다. 일본인 보통인부가 1원78전을 받는 것에 비하면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하녀들이 받는 월급 역시 7원99전으로 일본인 하녀(15원1전)에 비해 상당한 홀대를 받았다. 당시 신발 한 켤레 가격은 12원65전. 하녀들이 한 달 내내 일해서 번 돈으로도 구입이 불가능했다.
통계청이 17일 국가통계포털(KOSIS)을 통해 제공하기 시작한 광복 이전 통계 내용이다. 통계청은 일제 강점기의 다양한 경제, 사회상을 통계로 알아볼 수 있도록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통계연보를 번역해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 통계에는 국토면적, 인구, 보건, 교육, 물가 등 14개 분야 2,3000여개 지표가 수록됐다.
1920년대와 30년대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은 경상북도였다. 전국 인구의 12.2%가 몰려 있었고, 전라남도(11.3%) 경상남도(10.4%) 경기도(10.3%)가 뒤를 이었다. 경기도가 인구 1위 지역으로 올라선 것은 1940년으로 12.0%를 차지했다.
광복 전 한국인 대부분은 농업에 의존하며 살았다. 1930년 기준으로 한국인 10명 중 8명 이상(80.5%)이 농림목축업에 종사했고, 상업 및 교통업이 6.4%, 작업장인부나 막노동, 날품팔이 종사자가 4.8%를 차지했다.
반면, 당시 일본인 중에서는 농림목축업 종사자가 8.4%에 불과했다. 대신 공무원 및 자유업이 35.2%로 가장 많았고, 상업 및 교통업 종사자도 29.4%나 됐다.
당시 사망 원인 1순위는 수막염, 뇌성마비 등 신경계병. 사망자 5명 중 1명 꼴(19.8%)이었다. 위ㆍ십이지장궤양 등 소화기병이 18.2%, 폐렴이나 기관지염 같은 호흡기병이 14.2%였다.
형편이 어렵고 의료 수준이 떨어지다 보니, 소아 사망도 많았다. 1938년 사망한 5세 미만 아이는 모두 16만8,619명. 특히 태어난 지 1년이 안 돼 사망한 아이가 절반에 가까운 8만86명이었다.
특히 눈에 띄는 당시 통계는 신분별 출생 구분. 1938년 태어난 아이가 모두 79만2,975명이었는데, 이중 첩에게서 낳은 서자가 2만4,782명으로 3%를 넘었다. 당시 성비는 110.63. 여자 아이 100명당 남자 아이가 110명 수준이었다.
광복 전 일본에 대한 무역의존도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1932년 기준으로 볼 때, 일본이 수ㆍ출입의 85.7%를 차지했고, 만주국(11.0%) 미국(0.9%) 중국(0.8%)이 뒤를 이었다.
이영태 기자 ytlee@hk.co.kr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